16. 비합리극의 원조인가? 앞에서 우리는 「페르 귄트」가 병든 시민 사회의 징후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해석은 없을까요? 먼 훗날에 이르러 사람들은 작품을 또 다르게 해석하였습니다. 즉 작품 속에 반영된 미래 지향적 요소를 발견해낸 것입니다. 말하자면 입센의 작품은 상징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의 특성 뿐 아니라, 서사극의 요소 그리고 비합리극의 특성을 선취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극작품을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 5막 첫 부분에 “낯선 행인”이 등장하는데, 이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보편적 알레고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낯선 행인”은 악마를 가리킬 수 있고, 입센 자신을 지칭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 경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Englert: 20) 혹자는 이 작품을 괴테의 파우스트와 비교하면서, 모든 사건을 도덕성의 관점에서 투시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납득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진 사회의 윤리와 주인공 사이의 윤리적 대립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7. 현대인의 심리 구조와 페르 귄트: 특히 놀라운 것은 입센의 작품의 내용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이론적 논거를 반증해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페르 귄트는 단순히 노르웨이의 인간형을 반영하는 인물이 아니라, 현대인의 심리적 구조를 그대로 반증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는 가령 환상과 기이한 사고에 이끌린 채 살아가는 병적인 인간의 전형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어머니 아제는 다음과 일갈합니다. “페르는 소주를 필요해. 두려움을 떨치려고 거짓을 말하지. 아, 그래 우리는 왕자와 요정 그리고 그밖의 동물 우화를 필요로 해, 신부 남치 또한.”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페르 귄트의 파란만장한 역정은 갈망, 동경 그리고 두려움 등과 관련되는 낮꿈일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어쨌든 훗날에 「페르 귄트」는 현대의 제반 희곡 작품에 등장하는 유형적 인간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판타지를 추종하는 주인공의 경향은 입센의 예술가 상이 드러내는 전형적 유형이라는 것입니다. 입센의 작품은 특히 악령의 장면에서 놀라운 문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체의 독창성은 이후의 극작품에서 좀처럼 발견될 수 없는 것입니다.
18. 모성과 관능 사이의 갈등 구조: 북 아프리카 사막의 베두인의 딸, 아니트라는 욕망과 관능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그미에게는 영혼이 없고, 진심, 다시 말해서 참된 마음이 자리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아니트라는 비양심적인 물질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아니라, 쾌락과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돈을 지녀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니트라는 거대 재벌과 조우하는 쾌락의 처녀로서, 주인공 페르 귄트를 하룻밤 유혹합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아니트라에 대한 주인공의 욕망은 고향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자신의 고향에서 살아가는 가족과 지인에 대한 감정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니트라는 솔베이지와 아제와는 완전히 정반대되는 거울상으로서 페르 귄트의 눈앞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솔베이그가 정조를 지키는 친밀하고도 정갈한 태도 그리고 이타주의로 일관하는 반면에, 아니트라는 육감적이고 경박하며, 이기주의적으로 처신하고 있습니다.
19. 페르 귄트에게 영향을 끼친 세 여인: 아니트라의 장면은 지금까지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습니다. 여성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모티프는 극작품에서 자주 언급되는 내용입니다. 30년대 비평가들은 입센의 「페르 귄트」를 “노르웨이의 파우스트”에 비유하였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작품에서 리하르트 바그너 (R. Wagner)의 오페라와의 유사성 및 현대 영화와의 관련성을 발견하려고 시도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작품을 신낭만주의와 결부시키려는 처사로서 올바르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 프로이트 그리고 라이히 등과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은 등장인물의 어머니와의 심리적 관계를 중요한 사항으로 간주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머니 아제 그리고 솔베이그에게서 느껴지는 모성이야 말로 주인공 페르 귄트의 파란만장한 삶을 처음부터 규정하는 근원적 동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이러한 해석 역시 작품의 일부에 대한 논평으로서 작품 전체의 주제의 측면에서 고찰한다면, 일방적이고 특수한 관점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작품 『페르 귄트』는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한 가문의 사회적 경제적 몰락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평생의 노력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19. 혹은 부리당의 당나귀: 마지막으로 심리적 해석과 관련하여 보다 세부적 사항을 거론하려고 합니다. 성과학자 빌헬름 라이히 Wilhelm Reich는 자신의 논문 「페르귄트의 광기」에서 현대의 젊은 남성의 심리적 갈등 관계를 발견하려고 하였습니다. 프로이트는 “심리적 애증 Ambivalenz”을 부리당의 당나귀에 관한 비유로 설명하였습니다. 동일한 양의 건초 사이에서 당나귀는 어느 것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끝내 굶어죽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페르 귄트는 솔베이그와 아니트라 사이에서 갈팡질팡합니다. 라이히에 의하면 솔베이그는 정결하나 매력이 없습니다.
이에 반해서 아니트라는 열정적으로 관능을 추구하지만, 약속이라든가 신뢰감과는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주인공은 솔베이그와 아니트라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행동은 오늘날 젊은 남자의 심리적 태도를 방불케 한다고 합니다. 즉 젊은 남자는 자신과 동일한 계급 혹은 높은 계급의 여자에게 연정을 느끼지만, 정작 그들의 육체적 욕망은 낮은 계층의 여자들에게서 해소된다는 것입니다. 페르 귄트의 광기 - 이것은 인간 삶이 계속되는 한 차제에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흥미진진한 테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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