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푸아니의 양성구유의 유토피아 (1)

필자 (匹子) 2018. 2. 19. 12:01

1. 절대 왕정 체제의 시대에 출현한 유토피아: 절대 왕정 시대에서는 더 나은 국가의 설계 작업이 활발하게 개진되지 않았습니다. 17세기 프랑스에서는 절대 권력의 군주가 조세를 갈취하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강제 노동을 강요하였습니다. 당시는 왕의 절대적 권한이 모든 인간 삶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국가의 설계는 물론이고 지상의 왕국을 지금, 여기라는 현실적 배경으로 서술하는 일은 위험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17세기 18세기의 절대 왕정 시대에 유토피아의 공간은 먼 나라, 혹은 우주의 공간으로 이전된 것 역시 바로 그 때문입니다. 1676년 제네바에서 자크 사뒤르의 모험 Les Avantures de Jacques Sadeur(1676)이라는 제목의 기이한 소설 한 편이 작자 미상으로 발표되었습니다. 나중에 소설을 집필한 사람은 가브리엘 드 푸아니 (Gabriel de Foigny, 1630 1692)로 밝혀지게 됩니다. 푸아니의 소설의 제목 역시 나중에 남쪽 대륙 알려지다 La Terra Australe connue로 수정됩니다. 이 작품은 남쪽 나라의 찬란한 나라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니 베라스 Denis Veirasse세바랑비 이야기(1675)와 같은 유형의 유토피아 소설입니다.

 

2. 작품에 대한 혹명: 지금까지 대부분의 고전적인 유토피아는 그 유형에 있어서 강력한 국가 체제를 강조했습니다. 그렇지만 푸아니의 유토피아는 구체적 시스템으로서의 질서가 아니라,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절대적 자유를 거리낌 없이 설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작품은 자웅양성이라는 기이한 인종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작품 내에 반영된 아나키즘의 요소 그리고 양성 인간의 묘사 등으로 인하여 미지의 남쪽대륙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로베르트 몰은 19세기 중엽에 푸아니의 소설이 빈약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문체 역시 경직되어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기상천외한 성에 관한 판타지가 독자들을 비현실적인 세계로 몰아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Mohl 86). 20세기 초반에 이 작품은 독일에서 혹평의 대상이었습니다. 19세기 말에 키르헨하임은 놀고먹는 정치적인 나라 Schlaraffia politica”에서 푸아니의 작품이 인간의 신체 구조를 변화시켜 국가를 황당하게 묘사한 졸작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하였습니다. (Kirchenheim: 145). 1892년에 클라인베히터는 미지의 남극대륙을 끔찍할 정도로 황당무계하다고 폄하하기도 하였습니다. (Kleinwächter: 23f).

 

3. 무정부주의의 유토피아 그리고 자웅양성의 새로운 인간: 상기한 사항을 고려할 때 작중 현실은 상당 부분 기상천외한 상상으로 착색되어 있어서, 푸아니 문학의 진가를 예리하게 발견한 사람은 20세기 초의 연구가, 안드레아스 보이크트입니다. 푸아니의 작품은 순수한 무정부주의의 사고를 처음으로 주제화한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푸아니는 놀랍게도 크로포트킨 이전에 무정부주의의 사상적 가능성을 처음으로 타진한 작가라는 것입니다. (Voigt: 89). 보이크트는 지배 구조반 지배구조라는 두 개의 방향을 설정하고, 전자를 국가주의의 유토피아 모델, 후자를 무정부주의의 공동체 모델로 설정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 공동체 모델은 나중에 다시 언급되겠지만 드니 디드로의 부갱빌 여행기 부록(1775)에서 다시 출현하였으며, 윌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 뉴스(1890)에서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냅니다.

 

4. 자웅양성의 인간: 푸아니의 소설은 국가의 제재나 간섭을 받지 않는 인간 사회를 묘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유토피아의 논의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두 가지 핵심적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토마스 모어 이후의 시점에서 인간이 과연 이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과연 유토피아의 설계가 실현 가능성에 있어서 어느 정도 적절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특히 푸아니의 소설은 이성이 아니라, 기존의 성도덕과 윤리에 어긋나는 기이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소설 속의 남쪽 대륙의 원주민들은 어떤 강제적 성윤리로써 인간의 성을 제한하지 않고 자웅양성의 삶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원래 자웅양성에 해당하는 헤르마프로디테Hermaphrodite”는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자인데, 신화에 의하면 때로는 남자로서 여성을, 때로는 여자로서 남성을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묘사로 인하여 초창기의 유토피아 연구자들은 푸아니의 작품을 저열하고 신을 모독하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매도하였습니다. 양성구유 両性具有는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가장 추악한 문학적 서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푸아니의 작품이 부분적으로 외설적이며, 사회적 윤리와는 거리가 먼 성적 향락을 거침없이 묘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아니의 작품은 미지에 관한 상상 문학이라기보다는, 고전적 유토피아의 반열에 올려야 하는 명작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 측면에서 17세기의 가부장적 이성을 중시하는 사회를 문학적으로 은근히 비아냥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5. 푸아니의 삶 (1): 푸아니의 파란만장한 삶은 엄격한 가톨릭주의와의 끝없는 대립으로 점철되었습니다. 푸아니는 1630년 라임에서 인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가난했으나, 자식 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푸아니는 일찍이 프란체스코 교단에 들어가서 수련생이 됩니다. 푸아니는 일찍부터 누구든 감복시킬 수 있는 황금의 혀, 즉 탁월한 언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밤 그는 수련생의 신분으로 라임에서 살던 몇몇 처녀들과 몰래 만나 밤새도록 흥청망청 놀았다고 합니다. 그의 애정 행각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단은 그의 행각을 성적 방종으로 규정하였습니다. 뒤이어 푸아니는 수련생 신분을 박탈당하고, “출교黜教라는 가혹한 결정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하나의 처벌로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교단으로부터 자초지종을 입수한 프랑스 당국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무시하고 (하기야 당시에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존재할 리 만무했습니다.), 그에게 더욱 가혹한 형벌을 내립니다. 그것은 국외 추방이라는 조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위스의 제네바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