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사드의 소돔의 120일

필자 (匹子) 2016. 8. 7. 16:23

 

친애하는 J, 오늘은 이른바 사디즘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프랑스의 기괴한 소설가, 도나시엥-알퐁스-프랑스와 마르키 드 사드 (D. Marquis de Sade, 1740 - 1814)의 소설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것은 소돔의 120일 혹은 방종의 학교 Les Cent-Vingt Journées de Sodome ou L’École du Libertinage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785년 감옥에서 집필되었는데, 이 원고는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1904년에야 이반 블로흐 Iwan Bloch라는 사람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반 블로흐는 우연히 발견한 누렇게 찌든 원고 뭉치를 읽고, 놀라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하여 5년 후인 1909년에 이 작품을 간행하였습니다.

 

일단 작가에 관해서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르키 드 사드는 1740년 그리 부유하지 않은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귀족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는 군대 학교에 다닌 뒤에 독일 지역에서 발생한 칠년 전쟁 (1756 - 1763)에 참전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장교로서 승진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그는 르네 페라지라는 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미는 돈 많은 귀족의 딸이었고, 세 명의 자식을 얻게 됩니다. 이로써 사드는 경제적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납니다. 1764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사드는 스위스 국경지역의 작은 땅들을 유산으로 할양받게 됩니다.

 

부자가 된 사드는 유한 귀족들이 그러하듯이 방탕한 생활을 즐깁니다. 그는 일단 아름다운 창녀들을 구매하여, 자기 집의 하녀로 일하게 했습니다. 이들은 나체 차림으로 온갖 엽색행각을 강요당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집단적 혼음은 사드의 일상적 일감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내까지 함께 방종한 유흥을 즐기게 했다는 사실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대목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제가 발생합니다. 1772년에 마르세이유 출신의 창녀 두 사람이 당국에 사드를 고발합니다.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른바 사랑의 묘약이라고 알려진 최음제인 칸타리덴사탕을 여자들에게 먹인 뒤에 그룹 섹스, 펠라티오 등 온갖 체위를 강요한 자가 사드 백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드는 그해 여름에 기소되어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처제의 도움으로 교묘하게 유치장을 빠져나와, 이탈리아로 도주합니다. 그와 함께 도망을 친 사람은 처제와 처제의 하녀였습니다. 이듬해에 사드는 이탈리아에 숨어 살면서, 두 여자 모두 자신의 애첩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사드가 자신의 처제와 놀아났다는 사실이 프랑스에 알려지고 드디어 장모의 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극도로 분노한 장모는 프랑스 권력의 도움으로 사드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게 하였습니다.

 

1777년 사드는 몰래 프랑스로 잠입했는데, 이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창졸지간에 형 집행만을 기다리는 사형수 신세가 된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1772년에 내려진 그에 대한 사형선고는 1778년에 파기됩니다. 그래도 그는 자유의 몸으로 풀려날 수 없습니다. 사드는 독서와 집필로 감옥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의 가족들은 온갖 서적과 필기도구를 보내주었습니다. 이때 1782년에 사드는 소돔의 120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불과 37일 만에 탈고했다고 합니다. 6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다가 그는 1784년에 탈출을 기도하지만, 이번에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사드 백작은 1784년에 악명 높은 바스티유 감옥으로 이전됩니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이 폭파되기 며칠 전에 그는 장벽 너머로 감옥 앞에 모인 데모대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이곳 죄수들이 연일 학살당하고 있다.”하고 고래고함을 지릅니다. 이때 간수들은 그를 정신이상자로 몰아서, 샤랑통 정신 병원에 보냅니다.

 

사드가 수많은 죄를 짓고 살아왔기 때문일까요? 인과응보인지는 몰라도, 그의 말년은 너무도 비참했습니다. 사드의 아내는 그에게 이혼을 청구합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이듬해인 1790년에 사드는 자유의 몸이 됩니다. 혁명의 시기에는 급진적 자코뱅 당에 가담하여 죽을 고비를 넘긴 다음에, 그는 가진 재산을 모조리 처분하여, 대부분의 돈을 아내에게 위자료로 지급하고, 일부를 생활비로 충당하며 살아갑니다. 그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801년 나폴레옹이 권좌에 오르게 되었을 때, 사드는 다시금 감옥에 갇힙니다. 이번에는 그의 음란한 책 줄리엣 Justin이 필화 사건으로 연루된 것입니다. 사드는 정신병자로 몰려 1803년 다시 샤랑통 정신병원에 수감됩니다. 처음에는 여기서 집필에 몰두할 수 있었는데, 말년에 의사들은 그에게 독서와 집필을 금지합니다. 사드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외롭게 갇혀 살다가 결국 유명을 달리합니다.

 

이제 소돔의 120을 언급하기로 합니다. 사드는 책에서 결코 자유분방한 천국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그의 놀라운 상상력은 바스티유 요새 내의 독립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욕정을 창안했습니다. 사드는 독자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독자여, 당신은 이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신을 똑바로 차려서, 세상에서 가장 음란한 이야기를 수용할 자세를 갖추어야 하네. 이것은 세계가 존속한 이래로 한 번도 글로 쓰이지 않은 것이니까.” 24명의 여자들과 아이들은 처음부터 블랑기 공작의 성에 갇혀 있습니다. 그들은 공작의 성노리개로 살아갑니다. 그밖에 22명의 남녀 노예가 고용되어 있습니다. 공작에게는 세 사람의 친구가 있습니다. 주교, 재판관 그리고 은행가가 그들입니다. 공작은 수많은 테러를 자행하며, 갇힌 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습니다.

 

첫째로 공작 블랑기는 사악함의 화신이며, 그의 일상은 방종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는 병리학적으로 고찰할 때 괴물과 같은 심성을 지닌 사디스트입니다. 기분 나쁘면 무차별적으로 살인을 일삼습니다. 그의 마음은 동물적 오르가슴으로 부글거리고 있습니다. 작가는 어쩌면 루이 14세의 폭정을 염두에 두면서 공작을 묘사했는지 모릅니다. 두 번째 인물은 공작의 동생인 주교이자 무신론자입니다. 그는 건달 내지 시정잡배와 같은 무책임한 인간이며, 오로지 미소년들에게 집착합니다. 동성연애자로서 그는 무엇보다도 여성의 성기를 저주합니다. 그래도 주교는 공작에 비해서 최소한의 이성을 지닌 영특한 사내입니다. 세 번째 인물은 재판관 쿠르발입니다. 그에게는 남성의 힘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섹스에 골몰하는 대신에, 언제나 술에 취해 있습니다. 쿠르발은 방종한 게임이 극에 달할 때 등장하여 온갖 독설을 퍼붓는 독설가입니다. 그의 몸은 더러운 냄새로 찌들어 있습니다. 네 번째 인물은 세무서 직원이자 은행가입니다. 그는 작은 고추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광란의 유흥이 진행되는 동안에 언제나 뒷전에 서성거리는 변태성욕자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딸과 아내를 포함한 46명의 남녀를 성적으로 학대합니다.

 

공작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곰곰이 숙고해 봐, 우리가 누구이며, 너희가 누구인지를. 그렇게 하면 너희는 아마 모골이 송연하게 될 거야. 너희는 도저히 다른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요새에 갇혀 있어. 바깥의 어느 누구도 너희가 여기에 있는지 알지 못해. 친구들도 부모도 전혀 모르고 있어. 너희는 이 세상에서 죽은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야.” 사드는 이 소설에서 전체주의 시스템의 이론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후기 계몽주의 시대에 가장 핵심적인 논란으로 제기되던 사항이지요. 공작과 그의 친구 세 남자는 24명에게 온갖 성도착적인 고문을 마다하지 않으며, 극도의 흥분상태에 이르면 상대방을 목 졸라 죽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고문은 앙시앵레짐 치하에서 자행되던 600명의 신하들에 대한 고문 행위를 방불케 합니다.

 

소설의 내용은 단편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장면마다 변태성욕의 기기묘묘한 장면이 연출됩니다. 사람들은 상대를 바꾸어가면서 섹스하고, 상대방을 채찍과 못 등으로 고통을 가합니다. 남자들은 처녀들을 골라, 그들의 처녀성을 유린하고, 유부녀들을 윤간함으로써 그들을 임신을 시킵니다. 간간이 신을 모독하는 대화가 등장하고, 반도덕적이고 엽기적 내용에 관한 철학적 의미가 첨가되고 있습니다. 소설 전편에 걸쳐 동성애와 이성애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여성들이 동물처럼 취급당합니다. 특히 여성 학대의 장면은 도를 넘어설 정도입니다. 성 도구인 그들의 사지가 절단되기도 합니다. 공작은 급기야는 데리고 놀던 사람들을 한 명씩 골라 재미삼아 죽입니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46명의 노리개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16명에 불과합니다.

 

원고는 세로 11센티, 가로 20미터에 해당하는 두루마리 종이에 빽빽한 글씨로 집필되었습니다. 그 까닭은 간수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스티유 감옥이 폭파된 뒤에 사드의 원고는 유실되었습니다. 먼 훗날 원고를 발견하여 이를 세상에 공개한 사람은 베를린의 성과학자 이반 블로흐였습니다. 문헌학자 모리스 하이네는 원고를 세심하게 정리하여 세 권으로 간행하였습니다. 나중에 파올로 파솔리니 Paolo Pasolini1975년에 사드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영화는 1997년에 이르러 개봉되었습니다. 영화를 관람한 대부분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너무나 끔찍하여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영화는 최소한 루이 14세가 아니라, 무솔리니의 파시즘 속에 도사린 성적이고 정치적인 끔찍함을 비판한다는 측면에서 일말의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