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림 (명저)

(명저 소개) 최문규의 '죽음의 얼굴'

필자 (匹子) 2017. 10. 28. 11:02

최문규 교수는 2014년에 죽음의 얼굴을 간행하였다. (21세기 북스) 과문한 탓에 필자는 이제야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죽음의 얼굴은 거의 600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문헌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 언급되는 작가와 이론가는 다음과 같다.

 

프로이트 (19 페이지), 엘리아스 (20 페이지) 셀리, 케이건 (21 페이지), 비트겐슈타인  (30), 에피쿠로스 (31 페이지), 볼테르 (32 페이지), 셰익스피어 (33 페이지), 노발리스, 에드워드 영 (33 페이지), 키르케고르 (33 페이지), 소크라테스 (44 페이지), 데카르트 (45 페이지), 메리 셸리 (46 페이지), 괴테 (46 페이지), 장자 (47 페이지), 바타유 (48 페이지), 플라톤 (51 페이지), 루돌프 아이슬러 (51 페이지 이하), 헤겔, 하이데거 (56 페이지), 보들레르 (60 페이지), 아리에스 (65 페이지), 벤야민 (68 페이지), 하이데거 (95 페이지), 사르트르 (104 페이지), 데리다 (105 페이지), 보드리야르 (141 페이지), 니체 (164 페이지), 레싱 (170 페이지), 에드먼드 버크 (194페이지) 뷔히너 (201 페이지), 레비나스 (209 페이지), (214 페이지) , 베른하르트 (221 페이지), 하우스호퍼 (224 페이지) 바흐만 (224 페이지) 이하 생략하기로 한다.

 

 

한국 문학에 관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박태상, 이인복, 김억 (34 페이지) 윤영수 (40 페이지), 황순원 (216 페이지) 박종화 (216 페이지), 조선작 (218 페이지), 김동리 (219 페이지), 나도향 (220 페이지), 김연수 (222 페이지), 이청준 (223 페이지), 이하 생략하기로 한다.

 

죽음의 얼굴

 

 

죽음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여 논리 정연하게 해명해준 저자의 노고는 칭찬해줄만하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과 같다. 수많은 자료 그리고 방대한 언급을 접하게 되면, 독자는 죽음에 관한 문헌 내지 죽음에 관한 사고가 이 책 속에 모조리 담겨 있다고 지레짐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본서에 생략된 사항들이 많이 있다. 이를테면 본서는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에 나타난 신과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자살이라든가, 신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안티고네의 열정을 빠뜨리고 있다. 게다가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 물론 이는 지엽적인 사항에 해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죽음에 관한 신학적 논의에 관한 언급이 지극히 가볍게 취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류가 창안해낸 모든 종교 속에는 죽음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가장 심층적 갈망이 내재하고 있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수많은 종교인들의 의식 속에 항상 남아 있는 것이었다. 이단저의 처형, 마녀로 화형당한 이야기는 본서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다. 특히 죽음에 관한 신학자들의 논의가  생략된 것은 이 책의 하자로 이해될 것 같아 보인다. 저자는 죽음 마저 극복하려는 지고의 갈망에 대해서는 아예 처음부터 관심을 두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저자는 어째서 에로스가 아니라, 죽음을 하나의 연구 대상으로 하여 논의를 지속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과 같은 내적 모티프 때문인지 모른다. 죽음이란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하나의 현상이며, 이에 대한 어떠한 인간적 저항도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의 모티프에 남아 있는 것은 단 하나 죽음이라는 결말에서 드러나는 예술적 아름다움이라는 흔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의 심미주의의 예술론이 은근히 드러나고 있다. 인간의 행위에는 한계가 있는데, 겁도 없이 바빌론의 탑을 건설하려는 오만을 품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부분적으로 타당하다. 죽음이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마지막 단계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아도르노는 유토피아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는 최후의 모티프로서 죽음을 예로 든 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려고 결심하는 애타는 갈망마저 모조리 부인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