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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저) 배철현: 인간의 위대한 여정

필자 (匹子) 2017. 7. 21. 11:44

배철현: 인간의 위대한 여정 -

 

빅뱅에서 호모 사피엔스까지 우리가 살아남은 단 하나의 이유 (21세기 북스 2017)

 

배철현 교수는 인간이 살아남은 이유를 이타심에서 찾고 있다. 그의 말을 인용하기로 한다. "인간 본성의 핵심은 이타적 유전자다. 공감, 배려, 친절, 정의, 희생, 정직 등은 이타심에서 피어난 꽃이다. 그 열매가 바로 컴패션Compassion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 (passion)을 자신도 '함께 com' 느껴 그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쓰는 마음과 행동이다. 컴패션을 한자로 표현하면 '자비 慈悲', 아랍어로는 라흐민rahmin, 히브리어로는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는 레헴rehem 이라고 한다."

 

남의 불행과 죽음에 눈물을 흘리고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 - 그것이 지금까지의 인간을 살아남게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이러한 마음이야 말로 가장 인간다움을 마련해주고 인간의 정서를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서양의 비극의 근원적 모티프가 연민Ἔλεος과 공포로 확정되었고, 이후 근대의 시기에 시민 비극의 근본적 정서로 이어온 것은 연민의 정서였다. 그렇기에 연민의 감정이 가장 인간다움을 안겨주며 이타적 정신을 고취시키게 하는 근원임에 틀림이 없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는 세월호 사건으로 인한 죽음에 분노하고 슬퍼하는 마음으로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고 살아간다. 함께 괴로워하는 마음자세 Mit - Leid, 가까운 사람에게 인정을 베풀고 (慈), 가까운 사람의 불행에 슬퍼하는 (悲) 마음씀씀이야 말로 인간의 정서 가운데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 점을 배 교수는 지적하는 것이리라.

 

 

 

 

 

 

배교수의 주장을 무조건 반박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다음과 같은 반론이 떠오른다. 과연 이러한 고결한 감정과 영혼의 풍요로움을 안겨주는 마음 자세가 오늘날 인간을 살아남게 했을까? 역사는 동족을 살해하고, 여성을 겁탈하며,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온갖 잡다한 사악함을 행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수없이 보여준다. 어째서 배교수는 이러한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과거 신화 속으로 도피하여 거기에서 인간의 찬란한 이타주의의 자세를 무조건 강조하려는 것일까? 

 

차라리 이상을 추상적으로 추구할 게 아니라, 주어진 현실의 파국과 고해의 현실에서 차선책을 발견해 나가는 게 현실적인 자세가 아닐까? 예컨대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지만, 절반은 충동에 사로잡히는 동물적 존재가 아닌가? 게다가 지금까지 인간은 이러한 동물성을 부정하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아벨도 카인도 싫든 좋든 간에 모두 인간이었다. 그밖에 대부분의 종교는 금욕을 강조하며 인간의 욕구를 차단시켜 왔다. 이로써 대부분의 종교는 공히 여성을 억압하고 어떤 유희와 방종한 삶에 철퇴를 가해오지 않았던가? 이러한 세계관은 21세기에 이르러 있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오늘날 생태계 파괴로 인하여 수많은 생명체들이 멸종 위기를 맞이하고 있지 않는가? 70억이 지구위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지금, 핵무기, GMO, 슈퍼 태풍 그리고 핵 원자로가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앗아갈지 아무도 모른다. 이를 고려할 때 이타주의를 강조하고 이를 모방하는 노력이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충분한 덕목이라고 간주될 수는 없다. 물구나무선 먹이 피라미드의 삶에 직면한 인간은 인간의 도덕을 근본적으로 재정비하고 새로운 인간형과 모랄을 정립하는 게 오히려 더 시급하지 않을까? 인간의 사악한 이기주의의 측면을 인정하고, 평화, 평등, 사랑과 성에 대한 관용, 상생 그리고 겸허함을 추구하는 생태적 인간형의 태도가 더 필요한 게 아닐까?  이러한 이의 제기가 동어반복의 논리로 치부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