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문학 이론

서로박: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 외디푸스

필자 (匹子) 2017. 2. 4. 09:54

질 들뢰즈 (1925 -)와 펠릭스 카타리 (1930 -)의 "반 오이디푸스 (L'Anti-Œdipe)"1972년 파리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반 오이디푸스는 자본주의적 기계 장치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자본의 흐름이라는 과정 속에 욕망의 에너지를 부여한다. 저자들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개념과 유사한 방식으로) 정신분열의 과정을 생산으로 해석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과정은 생산력으로 해방되지만, 의료적 치원에서의 근본으로 볼 때는 질곡에 갇히는 셈이다.

 

분열자는 -마치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대항처럼-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에 대항해 싸운다. 그는 자신의 광기에 아무런 죄를 부과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분열된 자는 마치 디오니소스처럼 조각난 세계의 절대성을 철저히 보장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국가는 망각의 기계 체제로서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 체제는 욕망의 생산성을 마비시킨다. 이제부터 욕망은 우주론적인 거세의 행위로서 법의 사슬에 완전히 묶이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욕망은 무언가를 명명할 능력을 완전히 빼앗긴 셈이다. 이때부터 욕망이나 열망은 법과 동일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정신 분석은 이러한 유형의 억압된 것에 관해 기술하고 있는데, 이때 드러난 상은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는 (프로이트가 가족 사이의 관계를 끌어들임으로써) 왜곡되어 있다고 한다. 가령 프로이트는 내면성이라는 제단을 모시기 위해서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희생하고 말았으며, 창조적 욕망을 (이를 대변하는) 연극의 친밀한 이야기 내지는 극적 사건 속으로 축소화시켰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반 오이디푸스의 사고는 노이로제의 배후, 다시 말해 성 도착적인 세계를 정복하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과의 동반 확장을 생각하기 위하여] 인간의 죄와 나르시시즘의 상처 등을 부인한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를 왕위 취임의 사건으로서, 라캉 (Lacan)(이와는 반대로) 구조적 기능으로서 규정한 바 있다. 이에 비하면 "앙티 오이디푸스"는 어떤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정신 분석학적 폭력에 대해 강렬히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여기서 분열된 자에 대한 분석이 들어선다. 이것은 고아가 된 무의식의 영역, 정확히 말해 모든 법의 저편에 감추어져 있는 무의식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한 분석이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저자들은 정신 병리학을 철저히 반대해 온 렝 (Laing)을 추종하고 있다. 렝에 의하면 계몽주의는 어둠의 시대이며, 정신 분열증은 (우리의 차단된 두뇌의 틈 사이로 뚫고 나오는) 빛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한다.

 

과정으로서의 정신 분열증은 유일하게 우주적인 것이다.” 그것은 장벽으로서, 출현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실패로서 이해될 수 있다. 가슴과 입은 (가령 흐름, 차단, 유추 그리고 부분적 대상 등과 같은) 근원적 욕망의 기계적 작업을 형성시킨다. 갈망의 이러한 대상은 전체로 화하려는 노력로부터 피해 있다. 그것은 다양한 무엇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시리즈를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소리와 눈빛은 완전한 육체를 통해서 항상 전체로 화하려는 노력을 피해 나간다. 소리와 눈빛은 오늘날 시청각이라는 매개체와 연결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라캉의 부분적 객체의 이론을 정신 분석학의, 정신을 분열시키는 체제 파괴성이라고 이해한다. “지옥의 기계처럼 객체는 구조적으로 동일한 무게, 즉 욕망의 기계로 출현한다.” 그리하여 라캉의 이론은 한편으로는 부분적 객체의 혁명적 이론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 거세, 의미심장함 등에 따르는) 무의식의 반동적 질서가 설명되고 있다. “부분적 객체의 논리에 따르면 전체 역시 다만 하나의 부분에 불과하다. 전체는 (양자 수학에 말하는) 어떤 하나의 전류의 벡터들이며, [어떤 기능이 (원을 그리며) 순환하는] 릴레이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정신 분석학의 법칙 개념은 해방되며, 갈망은 우주라는 정보의 근원에 관해 어떤 “부정적 정보 내용을 담고 있는 엔트로피(negentrophisch)”의 에너지로 나타난다.

 

과학 기술의 기계는 생산과 생산물 사이의 구분 내지는 마멸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갈망의 생산은 동시에 생산의 생산이자 방해당하는 순환이라고 한다. 방해 작용은 기능 행위의 요소일 뿐, 그것은 한계가 아니다. 어떤 완전히 완성되지 않은 생산물의 그러한 기계는 (특수한 기계로 작용하는 에로티시즘을 발전시키는) 수선 작업과 일치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욕망의 기계적 동인 (agencement machinique de désire)이라고 한다. 그것은 고착된 기계의 동력을 연상시켜서는 안 되고, “바로 이러한 기계 (ce qui machine)”의 진행이 중시될 뿐이다.

 

반 오이디푸스에서 원용되고 있는 문학 이론적 특성: 들뢰즈와 가타리는 텍스트를 기계화하여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텍스트들을 하나의 외부에 대한 급진적 관련성속에서 기능하게 한다. (가령 그들의 카프카 해석에서 우리는 하나의 예를 찾을 수 있다.) 저자들은 해석학 대신에 텍스트의 실험적으로 테스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해석이란 신앙과 경건성 등에 대한 우리의 현대적 유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모든 방법론적인 문제들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경우 기계로서의 무의식에 관한 구상으로 파기된다. 그러니까 기계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그저 기능하지 않는가? 이러한 이유에서 반 오이디푸스는 새로운 학문의 이름을 설계하지 않고, 다만 어떤 사고의 문체이며, “거장에 의한 토론 (discours du maître)”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반 오이디푸스는 얼밀히 말하자면 학술서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학문, 현실적 균열, 대리 행위와 주체 등에 관한 조건들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들어서는 것은 계층 없는 학문 형태의 앙상블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합당하게 서적으로부터 무의미한 언어를 끄집어내어, 이를 전자의 언어로 활용하려고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