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a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서로박: 노이만의 레본나 (4)

필자 (匹子) 2020. 9. 1. 09:46

 

18. 구체적 유토피아, 작가의 제안 사항 (1): 작품의 마지막에는 작가가 제안하려는 사항이 6페이지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1. “급진적이고 합리적인 평의회 당이 구성되어야 한다.” 의회민주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고 직접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대안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소규모 공동체의 사회에서는 모두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힐 수 있으며, 수용되어야 합니다. 사회의 규모가 작으면, 직접 민주주의의 체제는 얼마든지 작동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세력이 더욱 세분화되어야 하고, 지방 자치운동이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2. “새로운 노동과 생산의 네트워크가 결성되어야 한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새로운 직업은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는 이러한 벤처 기업에 대해 호의적 태도를 취하며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재화는 물품 저장소에서 분배되므로, 경제적 이기심은 공동체 내에서는 결코 자라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공동체 운동을 통하여 시장 중심의 경제 체제를 서서히 허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19. 구체적 유토피아, 작가의 제안 사항 (2): 3. “사치스러운 물건을 생산하는 노동은 근절되어야 한다.” 모든 물건들 가운데 인간의 허영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노동 그리고 생산품은 엄밀히 따지면 살아가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삶에 필수적인 물품 외에는 어떠한 다른 물품을 생산하지 않는 게 생태계의 보호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4. “이윤 추구를 위한 상업적 광고는 철폐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레본나 공동체는 자본주의의 생산과 분배를 지양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공동체 내에서 함께 물품을 생산하고, 이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배분할 수 있도록 물품 저장소 내지 바자회 등의 행사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5. “주입식 교육은 사라지고, 학교는 철폐되어야 한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강제적으로 무언가를 배울 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구상하고 이에 상응하는 공부를 독자적으로 추구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움이란 상부의 이익을 위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 다시 말해서 개인의 고유한 이익을 위해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입식 학교 교육이 서서히 사라지고, 피교육자 자신이 필요로 하는 교육 내용을 스스로 찾아서 그것을 배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는 오로지 아래로부터의 창의적 대안 교육으로서, 피교육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라야 합니다.

 

20 구체적 유토피아, 작가의 제안 사항 (3): 6. “만인에게 최저 소득이 주어져야 한다.” 기본소득제의 실행은 하층민의 생계를 도울 뿐 아니라, 노동의 질적 향상에도 도움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본 소득으로 생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강제 노동에 몰두하지 않고, 자의에 의해서 그리고 자신의 삶의 가치를 질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노동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에서는 연간 10000유로, 한국에서는 550만원의 기본 소득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강남훈: 322). 기본 소득제도에 대한 반론으로서 세 가지 논거가 있습니다. (1) 재원 마련의 문제, (2) 노동 욕구의 확장 방안, (3) 소비로 인한 신자유주의의 역풍 등이 그것입니다. 7. “기존의 권위주의의 정치 경제의 체제 내지 기관들은 해체되어야 한다.” 모든 체제 내지 기관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국가의 권위를 신장시키는 데 기여합니다. 그렇기에 정치, 교육, 심리 분석 연구가들은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삶과 노동의 공동체를 결성하기 위해서 토론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노이만은 종교 이데올로기를 비판합니다. 새로운 대안 세계에 종교는 더 이상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게 있다면 그것은 무신론의 교리라고 합니다. (NeumannC: 27). 8. “개개인들에게 편안한 거주 공간이 주어져야 한다.” 이것이 실현되면, 사람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게 되고, 국가의 이데올로기의 영향 없이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거주공간은 더 이상 노동자들이 잠시 쉬는 공간일 수는 없습니다. 그곳은 모든 인간이 행복하고 의미 있게 생활할 수 있는 유희의 거처여야 합니다. 9. “자가용은 서서히 철폐되어야 한다.” 이는 환경을 보호하는 정책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공공연한 교통수단을 무료로 활용해야 하며, 새로운 전기 자동차를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20. 구체적 유토피아, 작가의 제안 사항 (4): 10.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심리를 자발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의사 전문가들은 자료만 제시하고, 진단만 내려야 하지, 개개인의 사적인 문제점에 깊이 개입하거나, 삶에 있어서의 어떤 결정에 함부로 간섭해서는 안 됩니다. 개인의 고유한 문제는 결코 하나의 강령 내지 학문적 체계에 의해서 해결책을 하달 받을 수는 없습니다. 각자 사회 구성원들이 세부적인 삶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어떤 해결책을 찾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11. “남성들이 나서서 여성의 해방을 인정하고, 이러한 노력을 지지해야 한다.” 진정한 여성 해방은 어쩌면 남성들에 의해서 시작되는 게 바람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남성들에게 그들 고유한 의견이 전달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페미니스트들의 사회적 반향이 처음부터 차단되어 있다는 것은 커다란 난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12. “사회적 역할을 나누는 데 있어서 여성이 우선권을 지녀야 한다.”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를 파악하고 결정을 내리는 일에 여성들이 배제되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사고를 위해서는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이론만 필요한 게 아니라, 주디스 버틀러 등과 같은 페미니즘 이론 그리고 시몬느 보바르, 뤼스 이리가라이 등의 심리학적 차원에서의 설득력 있는 사고와 사상 등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그렇게 해야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고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고 합니다.

 

21. 문제점 (1): 발터 노이만의 유토피아는 현대의 계층적 구도에 입각한 자본주의 산업 사회를 지양하고, 자연 친화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생태 공동체의 삶의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한 한 그것은 20세기 후반의 여성 운동과 평화 운동의 방향과 밀접하게 관련성을 지닙니다. 물론 여기에는 문학 유토피아의 한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첫째로 새로운 사회의 구도를 주도면밀하게 서술하는 데 몰두한 나머지 소설로서의 어떤 문학적으로 가상화된 어떤 줄거리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인공과 등장인물이 새로운 사회 환경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행동하는가? 하는 점을 전혀 접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발터 노이만의 유토피아는 경제 영역에서 제반 시스템이 명확히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지 않는다는 치명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론 레본나는 도시 하노버의 대안도시라는 무정부주의적 구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릿한 지적만으로는 대안도시의 경제적 시스템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노이만이 설계한 레본나공동체의 경우 시장이 철폐되어 있으며, 화폐가 철폐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경제적 측면에서 재화와 물품의 분배 방식 등에 관한 언급은 간략하게 처리되고 있습니다.

 

22. 문제점 (2): 우리는 발터 노이만의 유토피아에서 주어진 현실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라는 측면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없습니다. 특히 전통적 가족의 해체를 언급하지만, 자식의 교육에 관한 문제는 논외로 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플라톤과 캄파넬라가 언급한 여성 공동체와 공동 육아의 부분을 조금이라도 약술하는 게 옳았습니다. 게다가 작가는 사랑이 배제된 하룻밤의 동침이 과연 어떠한 측면에서 바람직한 사랑의 삶의 방식으로 정착될 수 있는지에 관한 객관적 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빌헬름 라이히의 강제적 성윤리에 관한 언급 역시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현대의 문학 유토피아에 비해서 노이만의 유토피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까닭은 현대인들이 오로지 강제적 성윤리의 삶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강제적 성윤리가 사라진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성적 해방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며, 삶에 있어서 성의 문제가 전부를 차지하지도 않습니다. 어쨌든 과거에 존재했던 학교와 감옥이 인간을 구속하는 수단이었다면, 과거에 존재했던 일부일처제의 결혼 제도 역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고유한 자유를 앗아가게 하고, 도의적 책임만을 강요해 왔다고 노이만은 주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