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츠베렌츠: 다시 블로흐 테제 (1)

필자 (匹子) 2022. 11. 21. 11:41

 

카를 리프크네히트 (1871 - 1919)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사회주의를 논하려고 하지 않는다. 비록 우리의 주머니에는 몇 푼의 잔고가 채워진 예금 통장이 꽂혀 있지만 말이다. 인간은 성공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 무언가를 배우는 생명체이다.

 

1.

 

블로흐의 많은 제자들은 스승을 배반하였다. 제자들에 관해서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것들은 글로 기술되지 않았다. 구동독에서는 일부 적으로 둔갑하여 경력을 쌓았고, 다른 일부는 숨어서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으려고 애를 썼다. 몇 명은 약 30년 후에 자신의 명예를 되찾으려고 시도함으로써 최소한 그들의 자존심을 지켰다. 이에 비하면 서독에서의 제자들은 어떠한가? 튀빙겐 출신의 블로흐 제자들은 세상으로 흩어졌다. 그들 가운데 라이프치히에 머물던 제자들은 거의 죽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은 상대방을 불신하였다. 말하자면 과거에 행했던 당과 국가 조직에 관한 발언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논쟁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독에서는 상아탑을 중심으로 포스트모던의 사고에 가담하는 게 마치 편안한 방책이었다. 블로흐의 요구사항은 이제 시대에 동떨어진 것으로 거부당했고, 마르크스주의를 공개적으로 혹은 노예의 언어로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명성에 흠집을 남기거나 출세에 지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블로흐는 오늘날 무슨 의미를 전해주는가? 아무 것도 전해주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유약한 자들이 차출당하여 새로운 전쟁터로 향하던 1918년의 경우와 다를 바 없다.

 

2.

 

블로흐가 1949년에 라이프치히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나름대로 그를 융숭하게 대접했다. 이는 블로흐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권력의 슬로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로 인하여 블로흐는 자신의 초기 저작물의 입장을 은근히 저버려야 했다. 토마스 뮌처의 책을 세밀하게 읽고 이에 동의하는 독자는 블로흐의 초기 저서,『유토피아의 정신』(1816)의 주제에 결코 관대한 태도를 취하지 못할 것이다. 반파시즘을 증명해주는 책들은 거대한 범위로 환영을 받았다. 1956년까지『희망의 원리』제 1권과 제 2권이 간행되어,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지만, 제 3권은 의회로 거부당했다. 동독의 권력자들이 좀 더 세밀하게 읽었더라면, 1권과 2권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거부감을 드러내었을 것이다. 몇몇 열정적인 동지들은 1957년 이후부터 이 책을 악랄하게 저주하기 시작했다. 자유로운 철학은 동쪽의 땅에서 제대로 개진되지 못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그저 사보타주의 방식으로 미약하게 모습을 드러내었을 뿐이다.

 

3.

 

물질주의로 화한 유대주의 내지 기독교는 오늘날 물질주의의 특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현대화된 마르크스주의를 제외한다면, 블로흐야 말로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를 혁신한 자로서 두 개의 사상을 원래의 토대 위로 되돌리게 해준 유일한 사상가가 아닐 수 없다. 자고로 평화주의는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의 전쟁 추진을 위한 공개적인 발언으로 활용되곤 했다. 마찬가지로 전쟁 역시 하나의 필요악으로서 평화를 위한 목적으로 치러지곤 한다. 블로흐의 눈에는 소련 권력이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확고한 토대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비쳤다. 만약 이러한 확고한 토대가 정립된다면, 블로흐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물론 1941년 독일의 공격과 이에 대한 소련의 방어적인 군사행동은 여기서 예외가 되겠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소련의 질서는 블로흐에게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블로흐의 이단적인 철학은 소련이 안전하다는 토대 하에서 논리 정연하게 전달될 수 있었다.

 

4.

동독을 떠난 서독으로 망명한 뒤에 블로흐는 자신의 주저 『희망의 원리』의 근간이 되는 토대 자체를 상실하였으며, 그것을 공개적으로 부인하였다. 그는 동유럽이라는 외부적 토대를 더 이상 작품 속에 도입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사고를 초기 작품의 내용과 다시금 연결시키기 시작했다. 가령 그의 책 『세계의 실험』은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헌정되어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 (1871 - 1919)는 카를 리프크네히트 (1871 - 1919)와 함께 세계대전에 완강히 저항한 혁명가였다. 이들이 추구하던 혁명은 주위 사람들의 배반으로 인하여 실패로 끝났고, 그 다음에 두 사람은 전투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국에는 좌절하고 만다.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모두 살해당했다. 히틀러의 제3제국이 1918년 독일 혁명의 실패의 결과였다면, 스탈린주의는 “하나의 국가적 사회주의”가 어떠한 결과로 치닫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고립된 러시아가 사회주의를 시도한 것도 따지고 보면 독일 국가가 자국의 평화 정책을 시종일관 추진한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 이렇듯 독일 제국과 사회민주당 사이의 수치스러운 조약은 겉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되어 역사 속으로 이전되고 말았다.

 

 

 

 로자 룩셈부르크 (1871 - 1919)

 

5.

독일에서 1918년 11월에 발생한 혁명은 절반의 혁명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배반으로 인하여 결국 실패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독일인들은 다시금 제 2차 세계대전을 치르게 된다. 1945년 전쟁이 끝난 다음에 평화주의는 냉전 체제로 인하여 더 이상 아무런 실천 가능성을 찾지 못하게 된다. 21세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비로소 평화에 관해서 재차 질문을 던진다. 독일이 아니면, 과연 이 세상의 어느 국가가 -블로흐의 사상에 근거하여- 국가적 군비 축소와 같은 무장 해제를 제대로 실천할 수 있겠는가? 블로흐는 제 1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줄기차게 평화주의를 부르짖었으나, 사고의 급진적 전환을 위한 정치적인 투쟁에서 많은 지지자를 확보하지 못했다.

 

6.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마르크스의 사상으로부터 소외된 것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추구하는 사회 계층의 이론에 불과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모든 것을 명령으로 해결하려는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개개인의 자유를 최소화시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사상은 역사적 필연성의 원칙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추구하는 국가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블로흐가 청년 마르크스의 사상을 고찰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동구의 정치국은 이전에 젊은 마르크스를 계급의 적으로 규정하였다. 동구의 문화 관료들 가운데 수많은 지식인들이 자살로써 삶을 마감하였는데도, 동독은 이를 은폐하기에 급급하였고, 자신의 잘못을 전혀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7.

동독의 스탈린주의자들은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에 반대하는 연설을 행한 뒤에도 스스로 스탈린주의를 부인한다고 거짓말했다. 그런데 몇몇은 오늘날에도 스탈린주의가 타당한 선택이라고 내심 굳게 믿고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변절하여, 극단적 반공주의로 돌아섰으며, 지금도 변절은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1917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10월 혁명을 반동적인 쿠데타라고 단언한다. 또한 그들은 한술 더 떠서 러시아의 볼셰비즘을 유럽 파시즘에 대한 원조 내지는 원형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가령 알렉산더 야코프레프 (A. Jakowlew, 1923 - 2005) 그리고 그의 친구인 프리드리히 히처 (Fr. Hitzer) 등은 최근에 간행한 책에서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극단적 좌파로부터 두체 (무솔리니)주의자로 향하는 우편향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