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츠베렌츠: 다시 블로흐 테제 (2)

필자 (匹子) 2022. 11. 21. 11:42

 

볼프강 하리히의 젊은 시절의 모습

 

8.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918년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절반의 혁명을 추구하였다. 혁명의 실패는 1933년 나치 반동주의의 승리를 낳았다. 노동자 혁명 운동은 그리하여 벼랑으로 몰리게 된다. 전후에는 소련의 영향으로 소련군 주둔 지역이 형성되었다. 동독 지역에서는 평화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게다가 관료들은 왜곡되고 변형된 사고를 지닌 인물로 구성되었다. 블로흐의 책, 『전쟁이 아니라, 투쟁이다 Kampf, nicht Krieg』는 형식적으로는 세계 평화를 위한 캠페인으로 등록되었지만, 전쟁 지향주의자들은 그 책을 완강하게 거부해 왔다. 진정한 평화는 오로지 투쟁의 방식으로써 이룩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확고부동한 것이었으며, 어떠한 여지도 용인하지 않았다.

 

망명을 마치고 돌아온 블로흐는 1920년 어느 날 하이델베르크 사회학자 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등장으로 대회장이 순간적으로 어수선해졌다. 이때 사회학자이자 막스베버의 동생인 알프레트 베버 (Alfred Weber, 1868 - 1958)는 살기등등한 태도를 행동으로 표현했다. 그는 블로흐를 향하여 “조국의 배반자”하고 소리치면서, 분을 참지 못하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지식인들은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살해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같은 동료에게 언어적 살인을 스슴치 않았던 것이다. 블로흐의 입장은 그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

 

9.

1989년/ 1990년 통독 이후로 베를린 공화국은 여러 측면에서 내리막길을 걸어야 했다. 구동독 지역의 사회 간접자본의 현대화 작업 그리고 그곳에서의 서독 제품의 소비로 말미암아 모든 제품은 한꺼번에 다 팔리고, 생산 자체가 일시적으로 차단되기도 하였다. 이는 서독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경제 위기를 안겨주었다.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독일은 언제나 다원주의로부터 단순성으로 향하는 심리적 충동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프로이센, 바이마르 공화국, 동서독은 언제나 어떤 다양한 사고로 출발했으나, 결국에 이르러서는 한결같이 다원주의가 종결되는 식으로 끝나고 말았다. 10년 내에 연방 하원은 야권 세력이 없이, 두 개의 보수적인 정당 (기민당, 사민당) 그리고 마치 두 개의 위성과 같은 정당 (녹색당, 자민당)으로 구성되었다.

 

이제 진정한 정당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사회적 단결은커녕, 사회 내의 경쟁만을 촉구하는 개혁주의자들만이 득실거릴 뿐이다. 기본법으로써 어떤 이득을 챙기는 자들이 활보하여 정당정치를 훼손하고 있다. 군사적 방어라는 원칙은 더 이상 효력을 상실하고, 정치가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타 국가에 대한 무력 개입 내지 공격을 하나의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기본법 제 1장 “결코 훼손될 수 없는 인간의 품위”라는 구절이 삭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61년에 간행된 블로흐의 책 『자연법과 인간의 품위』는 통일된 독일에서 조만간 저항 문학 내지 이와 관련된 역사적 문헌으로 편입될 위기에 처해 있다.

 

 

 

발터 얀카  

 

10.

블로흐의 사상은 동독의 마지막 기회였다. 이제 그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사회주의적으로 변화하고 생존할 수 있는 어떤 객관적 현실적 가능성”은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블로흐 외에도 볼프강 하리히 (Wolfgang Harich, 1923 - 1995), 발터 얀카 (Walter Janka, 1914 - 1994) 등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하리히가 앞으로 추동하는 근본적 에너지라면, 얀카는 블로흐와 하리히의 사상을 보장해주고 지탱해주는 토대나 다름이 없었다. 세 사람이야 말로 동독의 진정한 사회주의를 지탱할 수 있는 삼발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밖에 로베르트 하베만 (Robert Havemann 1910 - 1982) 그리고 루돌프 바로 (Rudolf Bahro, 1935 - 1997)의 경우도 얼마든지 여기에 포함될지 모른다. 경제학자 프리츠 베렌스 (Fritz Behrens)의 경우를 어떠한가? 이들은 동독 야권 세력의 역사에 결코 망각될 수 없는 인물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인간적인 면이나 저술의 측면에 있어서 20세기 문화의 영원한 혁명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인물은 바로 블로흐였다. 블로흐는 레닌과 룩셈부르크가 1905년 러시아 혁명의 문제로 대립하고 있을 시기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소련의 종말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주의의 발전 프로그램에 자극을 가하고 경고의 신호를 보내곤 하였다.

 

11.

우리는 소련 모델이 명약관화하게 실패했다는 사실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소련은 봉건 국가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고, 발전 내지 변화에 대해 시종일관 적대적인 자세를 취해 왔다. 소련의 혁명가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방향을 설정한 것은 최소한 20세기의 소련의 사정을 고려할 때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소련에서 권력을 장악한 자들은 노동자와 농민이 아니었다. 노동자와 농민 계급이 새롭게 굳건한 토대를 형성할까 두려워했던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레닌이었고, 노동자 농민을 위해서 위해서 싸운 사람은 트로츠키였다. 이 사실을 정확하게 지적한 사람은 유고슬라비아의 정치가이자 작가였던 밀로반 질라스 (Djilas, 1911 - 1995)였다. 스탈린은 소련의 적군으로 하여금 전쟁의 패배를 선언하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자국 내에서 끔찍한 숙청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럼에도 패배를 선언한 자는 소련군이 아니라, 독일군을 이끌던 히틀러였다. 말하자면 스탈린은 근본적으로 사회주의의 몰락에 대한 원흉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근본적인 오류는 스탈린이 혁명의 거짓된 이론을 충실히 따랐다는 사실에 있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저작물은 철학과 역사를 성찰하는 어떤 잠재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의 놀라운 성찰의 기법은 다음과 같은 변증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블로흐는 이른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방식, 다시 말해서 당국의 모든 정치적 개입을 거부하였고, 인민들로 하여금 끔찍한 현실 상황 속에서도 의연한 걸음을 포기하지 말도록 강하게 요구하였다. 물론 총구가 눈앞에서 굴복을 강요할 경우에는 예외가 되겠지만 말이다.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데도 의연하게 대처한다는 것은 자기희생만 초래하는 어리석은 행위나 다름이 없다. 의연하게 걸어간다는 것은 방패 위로 머리를 치켜들라는 요구가 아니라, 오히려 방패를 더욱 높이 치켜들라는 요구와 같다.

 

12.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혁명이란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무엇보다도 소유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들은 항상 모든 것으로 사회로 환원시키려고 한다. 이에 반해 신자유주의자들은 소유를 개인으로 귀속시키려고 애를 쓴다. 블로흐는 이 문제에 관해서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소유의 문제는 소련의 존재로 인하여 이미 해결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착각은 그의 사고 속에 하나의 빈 공간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1871년 파리 코뮌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모델은 1917년 10월 혁명의 모델로 반복되었다. 사회주의는 두 번 모두 오로지 전쟁의 결과로 현실화되었던 것이다. 만약 이러한 역사적 논리가 그 자체 타당하다면, 사회주의의 시도는 차제에는 미국과 아시아 사이의 세계대전의 결과로 어떤 작은 찬스를 얻게 될지 모른다. 미래의 혁명은 요즈음 빈번하게 나타나는 식민지 전쟁이라든가 내전 등에 의해서 출현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이 다양한 반혁명적 모델을 미리 설정함으로써 사회주의의 모든 시도를 사전에 봉쇄하려고 마음먹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류가 이제 황혼 길에 접어들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자고로 이데올로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소유의 문제를 모든 다른 문제보다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도록 조종하는 법이다. 그것은 다행히도 그렇게 세분화되어 있지 않다. 물론 이데올로기의 복합체는 다양하며, 문화의 영역에 비하면 부수적으로 간주되지만 말이다. 만약 “인간이 어떤 저열하고, 노예처럼 취급당하며, 버림받고 경멸당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모든 현실적 상황을 근본적으로 설계하는 일”이 문제라면, 마르크스의 문장은 반드시 칸트의 이른바 정언적 명령과 같은 높은 등급을 얻게 될 것이다.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 혁명은 단순한 우상숭배로 판명되기 마련이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다시 소환하였다. 이러한 소환은 전쟁과 평화가 서로 봉합되어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룩셈부르크는 아직도 유효하고 현대적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혁명가로서의 룩셈부르크는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패배의 상징적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의 패배는 레닌과 트로츠키가 러시아에서 우연한 승리를 거둠에 따라서 70년 이후로 연기되고 말았다.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오늘날 살아있다면, 그들은 트로츠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시 적군에 의해서 희생되고 말 것이다 거짓된 철학에서 거짓된 승리가 나타나는 법이다. 패배 또한 마찬가지이다. 머리와 심장 속의 혁명은 주어지지 않았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엘제 블로흐 폰 슈트리츠키에 대한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1918/ 19: 스위스에서의 망명. 가난 그리고 비참한 삶. (당시에 나는 말했다, 러시아 혁명은 수백만의 희생을 대가를 치렀다고.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도 매우 가치를 지닌다.) 마치 거지처럼 비참하게 거주하고, 끼니를 거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나의 철학은 지금까지 항상 내가 거주하는 왕궁이고, 나의 상상 속에 주어진 찬란한 방 내지 화려한 정원이었다. (...) 그러나 내 사고의 영역은 처음부터 어느 누구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미지의 나라가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