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송용구: 바람 소리

필자 (匹子) 2015. 3. 25. 11:50

바람 소리

- 어느 의사의 고백 -

송용구

 

앞 못 보는 자의 눈이 되고

앉은뱅이의 다리가 되는

그런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너의 눈과 너의 다리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나의 혀끝에

전사(戰士)처럼 칼을 들이대던

스무 살적 바람소리여

백일몽을 가위누르던

서슬 퍼런 바람 소리여

나를 잊으라 나를 용서하라

 

온 하루 빈 들녁에 퍼붓던

겨울 소나기 잠잠해지면

나는 쓸쓸히 저무는 강가에 꿇어 앉아

잊혀진 연서 (戀書)의 언약 같은

마른 억새 잎으로 입술을 내리치며

눈시울 붉은 달빛 속에

저주 받은 승냥이의 울음을

꺼이꺼이 게워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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