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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건: 최악의 투사

필자 (匹子) 2014. 7. 20. 08:02

병건 선생님은 미국 엘에이 정신분석 연구소에서 공부하였으며,신경 정신과 의사로 일하다가, 책 "당신은 마음에게 속고 있다."라는 책을 간행하였습니다. 현재 다시 미국 뉴욕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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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에, 세상 모든 일이 신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고 사람들이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가 그랬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해와 달이 뜨는 것도, 천둥번개가 치는 것도 모두 신 때문이라고 그때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만 5000명에 이른다고 하니, 그들의 세상에서는 신이 끼어들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지어낸 사람의 마음을 반영합니다. 그리스 신화도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마음과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5000명의 신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것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원인이 인간이 아닌 신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일을 내가 아니라 남이 한 것이라는 이야기이고, 책임도 남에게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사고방식은 일종의 ‘남 탓’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에로스 신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신과 인간을 막론하고 누구든(에로스 자신까지도) 그의 화살을 맞으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이 이야기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사랑마저도 그 마음의 주인인 인간이 아니라 신에게 좌지우지된다는 생각을 반영합니다. 이런 이야기까지 지어내서 신을 원망한 걸 보면 누군가에게 매혹되고 사랑에 빠지는 일은, 옛날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신의 장난으로밖에는 설명되지 않을 만큼 난감한 일이었나 봅니다.

 

 

누구나 제 마음속 환상을
투사해서 세상을 해석합니다
그 환상이 ‘시각’을 만듭니다
남의 마음 이해한다는 것도
결국 투사로부터 시작합니다

 

투사의 가장 좋지 못한 예는
왕따 등의 희생양 만들기
사람이 아닌 더 만만하고
익숙한 희생양 찾기도 합니다

그게 바로 ‘한국인’ 정체성이죠.

 

연예인에 대한 ‘순도 높은’ 투사

 

멜라니 클라인이라는 정신분석가의 이론을 적용하면, 이런 신화적 사고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클라인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아기의 마음속에 구체적인 내용의 환상(Fantasy)이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는 의미에서 융의 집단 무의식이나 플라톤의 이데아와 공통점이 있는 개념입니다.

 

 

이 환상 속에는 항상 대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어떤 대상이 어떤 행위를 한다’는 것이 클라인이 생각하는 환상의 문법입니다. 아기가 무언가를 경험하면 선천적으로 마음에 새겨져 있는 환상 중에 그 경험에 부합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상기됩니다. 그렇다는 것은, 환상 속 대상 때문에 그런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아기가 생각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선천적 환상 속 대상의 대부분은 부모, 특히 엄마의 신체 부위입니다. 갓난아기는 엄마를 사람이 아니라 신체 부위로 경험합니다. 각각의 신체 부위가 모두 엄마라는 한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은 나중에나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아기의 환상 속에는 엄마의 좋은 가슴과 나쁜 가슴이 있습니다. 젖을 먹고 배가 부른 건 좋은 가슴이 젖을 주기 때문이고, 배가 고픈 건 나쁜 가슴이 젖을 안 주기 때문입니다. 배가 아픈 건 나쁜 가슴이 독이 든 젖을 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느낌이 들든, 외부의 뭔가가 그런 느낌이 들도록 만든다고 아기는 생각합니다. 역시, 일종의 남 탓입니다.

 

 

갓난아기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사람이 그런 환상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클라인의 주장을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를 떠나, 사람의 마음속에 제각각의 환상이 존재한다는 데는 모든 정신분석 이론이 동의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제 마음속 환상을 투사(投射, Projection)해서 세상을 해석한다는 것에도 모든 이론이 동의합니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 세상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모두 제각각 자신만의 환상을 품고 세상을 살고, 경험합니다. 물론 환상의 내용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세상은 누군가에게는 약육강식의 정글이고, 누군가에게는 주님의 은총이 충만한 곳이고, 누군가에게는 허무와 고통만이 가득한 곳입니다. 제각각 환상의 내용에 따라 세상의 모습이 정해집니다. 마음속 환상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만듭니다.

 

 

세상에 대한 시각을 갖는다는 것, 즉 환상을 투사해서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일종의 왜곡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세상을 이해하는 유일하고도 불가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아무런 시각도 갖지 않는다면 세상은 거대한 혼란의 덩어리일 뿐, 우리는 세상에서 아무 의미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무엇에서든 질서와 패턴, 그리고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세상 같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각자의 시각으로 구성한 세상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세상은 5000명의 신이 좌지우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남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컴퓨터 파일을 복사하듯, 남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내 마음속으로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내 마음을 투사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면 나는 어떨지 상상하는 것이 이해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왜곡의 원인인 투사는, 동시에 이해의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것과 왜곡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입니다.

 

 

이해하려면 나만의 시각이 있어야 하지만, 나만의 시각은 곧 선입견 혹은 편견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제멋대로 세상을 봅니다. 늘 바깥세상에, 타인에게 내 마음을 투사해서 나만의 세상, 나만의 타인을 창조해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내 마음속의 어떤 환상 혹은 이미지가 타인에게 투사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모습이 정해집니다. 좋은 환상이 투사되면 이상화(理想化)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무서운 환상이 투사되면 그 사람은 두려운 사람이 되고, 나쁜 환상이 투사되면 그 사람은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됩니다.

 

 

투사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일어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일어납니다. 그럴 경우 좀더 ‘순도 높은’ 투사가 일어납니다. 모르는 만큼 환상으로 채워지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연예인에 대한 태도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들은 특정 연예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환상을 투사해서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듭니다. 그 이미지는 당연히 사람에 따라 무척 다릅니다. 그래서 같은 연예인을 두고 팬과 ‘안티’로 갈라져 설전을 벌이곤 합니다. 연예인 외에도 정치인, 운동선수 등 널리 알려진, 하지만 실제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순도 높은 투사의 대상이 됩니다.

 

 

투사는 사람을 대상으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정치집단, 직업군, 지역, 국가 등이 모두 투사의 대상이 됩니다. 특정 직업군을 이기적이고 돈만 밝히는 집단이라고 매도한다든지, 경상도와 전라도로 갈라져서 서로를 무조건 비방하는 현상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는 왜 축구를 못하는가?

 

 

투사의 가장 좋지 않은 예는 ‘왕따’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진 ‘희생양(Scapegoat) 만들기’입니다. 희생양 만들기는, 한 집단 내의 많은 사람이 특정한 한 사람에게 나쁜 환상을 투사해서 그 사람을 문젯거리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그 사람 탓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안 보이게 됩니다.

 

 

학교나 직장에서 따돌림당하는 사람의 정신적인 고통이 얼마나 큰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따돌림은 비교적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하지만 따돌림은 그보다 훨씬 교묘하게도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가족 중 한 명, 주로 아이 하나가 집안의 골칫거리가 됩니다. 식구들은 모두 그 아이만 없으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며 모든 것을 그 아이 탓으로 돌립니다. 어른들 사이의 갈등이 아이에게 투사되어 소위 문제아가 만들어지는 것은 흔한 현상입니다.

 

 

야비하게도, 저항할 수 없는 사람이 주로 희생양이 됩니다. 집단의 구성원들은 그 사람에게 나쁜 환상을 투사해서 아주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마음껏 공격을 퍼붓습니다. 그야말로 앞뒤 가릴 것 없는 공격성의 원시적인 배설입니다. 연예인 기사만 뜨면 악성 댓글을 ‘싸질러’ 놓은 것이 좋은 예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여러 정체성으로 살아갑니다. 나이, 성별, 가족관계, 국적, 직업, 취미. 그렇게 한 사람이 여러 정체성을 가집니다. 그중 무엇이 중요한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뉴욕에서 분석가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다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간 적이 있습니다. 일고여덟명의 정신분석가가 있었는데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들 유대인이나 정신분석가의 정체성이 훨씬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다만 9·11 이후 미국인이라는 것에 대한 의식이 조금 더 뚜렷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새삼 나는 늘 대한민국, 한국인 같은 단어를 염두에 두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이상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9·11이 미국인의 정체성을 상기시킨 것처럼, 우리가 겪어온 외상은 항상 우리가 한국인임을 절감하게 했을 것입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전쟁까지 겪으면서 우리로서는 대한민국과 한국인에 대해 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단일민족 개념을 강조한 역사교육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일조했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들로, 우리에게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무척 중요합니다.

 

 

희생양 만들기는 개인이나 집단 등 구체적인 사람(들)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근거도 없이 마구잡이로 한국인 타령을 들먹이는 것을 볼 때마다 저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좌절을 겪을 때마다, 자기애의 상처를 입을 때마다 사람은 남 탓을 하고 싶어지고, 희생양을 찾게 됩니다. 그 남이 꼭 사람일 필요가 없다면, 우리는 아주 가까이서 만만하고 익숙한 희생양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한국인’입니다.

 

축구에서 졌을 때 막무가내로 심판 탓만을 한다면 그것은 순수한 남 탓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종종 그런 거칠고 투박한 투사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마음이 성숙한 사람이라면 그런 식의 남 탓은 스스로에게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축구를 못하는 것은 심판 탓 같은 것으로는 가릴 수 없는 진실입니다. 결국 ‘우리는 왜 축구를 못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답은 명확합니다. 축구라는 종목의 저변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축구를 잘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분노와 좌절을 받아내는 쓰레기통

 

 

하지만 자기애에 상처를 받은 우리 마음은 그런 이성적인 답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은 기어이 희생양을 찾아내서 좌절에 의한 분노를 뿜어내야만 합니다. 심판을 희생양으로 삼는 건 너무 속 들여다보이는 일이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찾아내야 합니다. 이럴 때 선택되는 것이 쉽고도 편리한 ‘한국인’입니다. 그렇게 한국인을 들먹이는 사람에게 ‘당신도 한국인 아니냐?’고 물으면, 그건 맞지만 축구를 망쳐놓은 ‘나쁜 한국인’과 자신은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때 한국인 타령은 남 탓이 됩니다. 하지만 자신도 한국인인 이상, 한국인 타령은 스스로를 탓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한국인 타령은 남 탓과 자기비하의 두 가지 모습을 모두 가지게 됩니다.

 

 

개인이나 집단을 희생양 삼는 것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피해는 한국인 타령 쪽이 작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희생양 만들기처럼 한국인 타령도 생각을 중단시킨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한국인이어서’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거기가 막다른 길입니다.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진행되지 않습니다. 한국인 타령은 반성이 아닙니다. 반성하기 싫어서, 고민하기 싫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희생양 삼아 생각을 멈춰버리는 속임수입니다. 우리에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분노와 좌절, 그리고 가학적인 공격성을 다 받아내고 있는 쓰레기통 같은 것입니다.

 

 

저는 한국인 타령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것인지, 그런데도 왜 없어지지 않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이 칼럼을 시작했습니다. 외상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자기비하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야기했고, 자기애와 투사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자기비하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칼럼을 마치면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한국인 타령은 절대로 반성이 아닙니다. 좌절과 분노의 무분별한 배설일 뿐입니다. 배설해서 통증이 사라지면 그걸로 끝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배설이 아니라, 아픔을 견디면서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더라도, 왜 아픈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참을성 있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편리하고 달콤한 자기비하가 아니라,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반성과 생각입니다. 우리, 한국인에 대한 진지하고 집요한 고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