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1) 퐁트넬의 '아자앵 이야기'

필자 (匹子) 2023. 5. 2. 10:20

1. 계몽주의자, 퐁트넬: 베르나르 르 보비에 드 퐁트넬 (1657 1757)은 자신이 처한 시대정신을 예리하게 감지하여, 이를 문학과 학문으로 드러낸 프랑스의 지식인입니다. 그는 17세기 중엽 프랑스를 대표하는 계몽주의자로서 인민의 공공연한 견해의 중요성을 피력하였으며, 이와 병행하여 앙시앵레짐의 불법성을 때로는 은근히 때로는 명시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볼테르는 그를 루이 14세의 시대가 만들어낸 우주론적 정신의 소유자라고 극찬하기도 하였습니다. 퐁트넬은 인민을 계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학문의 제반 분야를 체계적으로 구분하는 게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이를테면 종교, 문학, 자연과학, 역사, 정치학, 철학, 인류학, 민속학 그리고 미학 등의 구분은 당시의 현실에서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퐁트넬은 이 모든 것을 백과사전식으로 분할하여, 이것들 모두 자신의 학문 연구의 스펙트럼으로 삼았습니다. 그가 계몽주의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서 활용한 문학의 영역도 상당히 많은 장르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그가 활용한 문학의 장르는 목자 문학의 시작품, 서간체 소설, 오페라 대본, 희극과 비극, 에세이 그리고 학문적 논문 등 매우 다양합니다. 게다가 유토피아를 설계한 문헌까지 합하면, 그의 문헌은 무척 다양하고도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2. 신구문학논쟁과 퐁트넬의 사회 비판: 퐁트넬은 계몽주의의 관점에서 거의 모든 장르를 활용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문헌들이 다음 세대에 정치적으로 영향을 끼치기를 바랐습니다. 언젠가 계몽주의 철학자 피에르 벨 Pierre Bayle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습니다. 즉 무신론자들은 차제에 자신의 도덕을 신앙으로부터 일탈시켜서 하나의 완전한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게 그 주장이었습니다. 퐁트넬은 베일의 이러한 주장을 문학적으로 그럴듯하게 형상화시켰을 뿐 아니라, “주어진 세계는 우주의 중심이다.”라는 기독교의 세계관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사제들이 자신의 신앙과 기득권을 공고히 하려고, 거짓을 말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게다가 신구논쟁이 발발했을 때, 구세대의 입장을 거부하고, 신세대의 입장에 동조한 사람이 바로 퐁트넬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구논쟁이란 17세기 말에 이르러 고대인의 우월성에 대한 반박이 C.페로에 의해 제기된 논쟁입니다. 이를테면 페로는 시작품 루이 대왕의 시대(1687)에서 당대의 문학이 고대 문학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라퐁텐이 위에에게 보낸 서간 시를 통해서 반론을 내세웠는데, 이로 인하여, 학자와 예술가들 사이에 거대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신구문학논쟁과 관련하여 퐁트넬은 고대의 예술적 문학적 척도는 결코 영원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학문이 발전했으며, 현실의 사회 역사적 맥락 역시 병행하여 발전했기 때문에 주어진 현실을 반영하는 문학과 예술은 새로운 미학적 예술적 형식을 필요로 한다고 합니다. 그밖에 퐁트넬은 어떠한 타협 없이 루이 14세의 절대주의 정치 체제를 비판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의 철회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며, 프로테스탄트와 자유주의자들과 친분을 쌓아갔습니다. 퐁트넬은 쌍수를 들고 영국의 명예혁명을 칭송하기도 하였습니다.

 

 

3. 퐁트넬의 삶 (1): 그렇지만 군주제 치하에서 사회의 구조적인 개혁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한 사람은 퐁트넬이었습니다. 수사계급은 어떠한 세금도 내지 않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직접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던 것입니다. 퐁트넬이 하나의 이상 국가를 꿈꾸고 이를 가상적인 방식으로 설계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비록 무신론자의 이상적인 공화국을 설계했지만, 그는 마치 미래를 예견하는 철학자처럼 다음의 사항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즉 앙시앵레짐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혁명 외에는 어떠한 방도가 없다고 말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쉽사리 떠올릴 수 있지만, 군주 체제에서 살아가는 지식인 한명으로서 이러한 급진적인 착상을 생각해낸다는 것 자체가 놀랍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렇다면 퐁트넬은 도대체 어떠한 사람이었을까요? 퐁트넬은 1657211일 프랑스 북부도시 루앙에서 법률가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였는데, 노르망디 의회의 임원이었습니다. 법학을 전공한 다음에 퐁트넬은 순식간에 법관으로 살아가리라는 희망을 저버립니다. 여기에는 그의 외삼촌의 영향이 컸습니다. 프랑스의 극작가 피에르 코르네유는 퐁트넬의 외삼촌이었습니다. 퐁트넬는 문학적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내었는데, 1670년에 루앙 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1674년에 파리로 가서 프랑스 아카데미에 등록하였는데, 그곳의 문학 경연대회에서 차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4. 퐁트넬의 삶 (2): 1677년부터 1689년까지 퐁트넬은 삼촌인 토마스 코르네유가 간행하는 잡지 새롭고도 멋진 메르쿠어 Nouveau Mercure Galant에 문학 작품을 발표합니다. 이 잡지는 프랑스 내에서 그렇게 저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퐁트넬이 문명을 떨치는 데 초석으로 작용한 정기간행물이었습니다. 퐁트넬은 이 잡지에 시와 극작품 그리고 비평 등을 발표하였습니다. 1680년에는 극작품 아스파가 두 차례 공연되었는데,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낙심한 젊은 극작가는 루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퐁트넬이 다시 파리에 정주하게 된 것은 1985년이었습니다. 16881월부터 퐁트넬은 신구문학논쟁에 뛰어들게 됩니다. 이와 병행하여 그는 계몽주의의 새로운 예술적 미학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창작에 임하게 됩니다. 퐁트넬은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의 철회를 간접적으로 비판하기 위해서 보르네오 섬의 기이한 관계 Relation curieuse de l’Isle de Bornéo를 발표합니다. 퐁트넬은 1691년 프랑스 아카데미에 선출되어 그곳의 학문 아카데미의 서기로 발탁됩니다. 이로써 그는 프랑스 학문 아카데미를 통해서 학문에 필요한 많은 연감을 간행하게 됩니다.

 

5. 퐁트넬의 삶 (3): 그러나 그가 간행한 신탁의 역사 Histoire des oracles두 번째 판이 권력을 비판하는 사악한 문헌으로 간주됩니다. 루이 14세의 책사들은 이 책에 신앙을 모독하는 불경스러운 내용이 담겨 있다고 판단하고, 저자를 신랄하게 문책합니다. 다행히 퐁트넬은 유럽 전역에 자신의 학문적 친구들을 사귄 바 있는데, 그들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퐁트넬은 죽음 직전에 처해서 다음과 같은 처벌을 감수합니다. 즉 루이 14세기 죽을 때까지 어떠한 정치 비판의 글도 발표할 수 없다는 게 바로 그 처벌이었습니다.

 

뒤이어 퐁트넬은 주로 자연과학의 책들을 간행합니다. 1715년부터 1723년까지 퐁트넬은 직접 정치 일선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필립 오를레앙의 개혁 세력에 동조하였습니다. 퐁트넬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무척 오래 살았습니다. 그는 낭트 칙령에서 나타난 종교적 관용을 환영하였고, 나름대로 유럽 전역에 평화가 자리하도록 하는 구상안을 설계하였습니다. 그의 바람은 프랑스 역시 영국처럼 명예혁명과 같은 의회 민주주의를 이룩함으로써 절대적 전제주의 국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17571월에 퐁트넬은 100살의 나이로 병으로 인한 고통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2 3 4 5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