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푸아니의 '미지의 지역 오스트레일리아' (2)

필자 (匹子) 2020. 10. 11. 10:28

 

9. 완전한 삶, 완전한 인간: 따라서 유럽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의 눈에는 아직 완전한 사람이 되지 못한 “반인 半人”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완전하게 발전된 이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여러 가지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서 오스트레일리아의 무정부주의의 공동체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아무런 마찰 없이 영위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이성의 힘에 의해서 이행되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람들은 위에서 아래로 향해 외치는 명령조의 말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이성이 명하는 대로 자연스럽고도 당당하게 행동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성이 법이요, 규칙이며 인간 삶의 유일한 척도입니다. 완전한 인간과 반인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자신의 시고와 갈망을 가급적이면 일치시키면서 살아갑니다. (Foigny: 183f).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는 정부와 중앙 관청이 없으며, 무언가를 명령하는 자와 이를 이행하는 윗사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이성이 자신의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이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원하는 바와 행동을 일치시키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는 혼란으로 인하여 엉망진창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개인적 자유와 평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런 제한 없이 조화롭게 살아가게 하고, 공동체의 동질성을 영위하게 해줍니다. 자크 사뒤르는 이를 알아차립니다. 그는 언어, 예절, 건축 그리고 그 밖의 사항에 관한, 놀라울 정도로 동일한 규칙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인공에게서 모어의 라파엘 히틀로데우스의 면모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10. 사유재산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에게는 불필요하다.: 푸아니는 완전한 재화 공동체에 관해서 토마스 모어가 기술한 범례를 따르고 있습니다. 내 것과 너의 것 사이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만인의 소유물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필요에 따라 재화를 분배합니다. 이를테면 그들에게는 재화 생산의 과정이 불필요합니다. 온화한 기후와 자연의 혜택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필요한 모든 것은 풍족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필요한 물건들을 반드시 조달해야 한다는 필연성 자체가 처음부터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탐욕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는 물건을 수집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면, 이는 당사자가 심리적으로 나약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1.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자연환경: 나아가 섬의 외부적 구조 역시 어떤 목표에 합당하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자연 환경 역시 그곳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무척 편리한 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령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산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광활한 초원을 멀리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합심하여 이곳의 땅을 평평하게 골라놓았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주거지를 기이한 방식으로 축조해놓았습니다. 집 한 채에는 제각기 네 명이 살 수 있는 네 개의 거주지가 있습니다. 25개의 집은 하나의 거주 구역으로 정해지며, 사람들은 16개의 거주 구역을 하나의 “사이차인”이라고 명명합니다. 말하자면 이곳 사람들은 점성술의 합리적 이상에 의거하여 거주지를 기하학적 모형으로 축조한 셈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가부장적 가족의 개념을 지니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남녀는 서로 만나서 일정 기간 동안 살다가 다시 헤어집니다. 따라서 이곳 사람들에게는 결혼과 이혼은 물론이요, 만남과 이별이라는 개념 자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어도 하나의 부락 내에서는 그들 자신을 한 명의 대아 (Atman, 大我)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정치적 문화적 혹은 교육적 목표에 따라 제각기 독특한 이름을 지닙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원주민의 수는 도합 일억 사천사백만 명으로 추산될 정도입니다.

 

12. 전쟁 그리고 잔악한 공동체 이기주의: 문제는 이곳 사람들이 외부의 다른 지역 사람들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 데 잇습니다. 제 12장에서 주인공은 오스트레일리아 인들의 적들에 관해서 언급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폰딘스라고 명명되는 거대한 적과 오랜 기간 동안 싸워왔습니다. 물론 이곳 사람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입니다. 그렇지만 낯선 국가가 이곳을 침공했을 경우, 자신의 삶의 터전과 동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쟁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들은 적의 마지막 잔당들이 궤멸되기 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 투쟁하였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의 이러한, 합리적이지만, 파괴적인 충동은 토마스 모어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이 경우 이성은 효과적인 공격과 파괴의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주인공, 자크 사뒤르 역시 방어를 위한 전쟁에 참가합니다.

 

13. 자크의 범죄: 그런데 전쟁터에서의 주인공의 여러 가지 행동은 이곳 사람들의 눈에는 엄청난 전쟁 범죄로 비칩니다. 이를테면 자크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지 않고 치고 빠지는 식으로 싸우는 방식, 중상을 입은 적군 포로에 대한 자크의 어설픈 동정심, 성적 욕망에 사로잡혀서 적국의 여인의 성을 취하려고 포옹하는 행위, 육류 고기를 아귀아귀 먹어치우는 짓거리 등이 그것들이었습니다. 가장 커다란 범죄는 자크 사뒤르가 승리의 순간에 적의 여자들을 모조리 죽이지 않고, 성적 노리개로 데리고 놀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하여 거대한 새를 타고 어디론가 도주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결국 그는 전쟁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주인공의 죄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적군에 대한 동정심이며, 다른 하나는 성적 욕망을 참아내지 못하는 인간적 약점이었습니다. 중상을 입은 적군의 포로를 인간적으로 대하라는 국제 적십자사의 슬로건은 때로는 군인 정신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한계 상황 속에서 내팽개쳐져 있는 여성의 성을 유린하는 행위는 역시 군인으로서의 금기사항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크는 군인으로서의 강인한 태도를 저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푸아니가 이렇게 서술한 데에는 작가로서의 한 가지 의향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이 이성을 신뢰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지만, 이성을 과도하게 맹신하게 되면, 얼마든지 어떤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4. 완벽한 유토피아 공동체는 존재하는가?: 공동체는 절대적 이성의 이름으로 모든 도덕을 규정하고, 사회적 조화로움을 완성시키지만, 전쟁을 치르며 적을 완전히 궤멸시킬 때에도 절대적 이성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의 내용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처음부터 국가의 체제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친애하는 F, 모든 사람이 각자의 위치에서 공동체의 이성의 원칙을 준수하며 살아간다면, 무정부주의의 사회는 아무런 마찰 없이 영위될 수 있다는 게 푸아니의 지론이었습니다. 만약 한 공동체가 국가의 권력의 힘에 의존하지 않은 채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유토피아 공동체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국가든, 일부 엘리트로 영위되는 작은 행정부든 간에, 공동체를 통솔하는 기관이 없다면, 하나의 공동체는 구체적 현실에서 나타나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비록 선장이 없더라도 조타수 내지 항해사가 없다는 풍랑을 맞이한 배는 암초에 걸려 전복되거나 파괴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푸아니가 묘사한 오스트리아 공동체의 유토피아는 그 자체 너무나 완벽한 무정부주의적인 모델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주위의 적들과의 전쟁을 치르는 데 있어서 어떤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와 조우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공 자크가 마지막 대목에서 고초를 겪는 것도 모두 이러한 문제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참고 문헌

- Foigny, Gabriel de: Eine neue Entdeckung der Terra Incognita Australis, in: Berneni Marie L.: Reise nach Utopia. Reader der Utopien, berlin 1982.

- Voigt, Andreas: Die sozialen Utopie. Fünf Vorträge, Leipzig 1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