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독일시

서로박: 본드라첵의 '자동차 안에서'

필자 (匹子) 2019. 1. 13. 08:52

 

 

 

친애하는 R, 오늘은 볼프 본드라첵 (Wolf Wondratschek)의 시문학을 다루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의 시작품은 수월하게 읽히고, 독자의 흥미를 부추깁니다. 시 속에 담긴 유머는 독자로 하여금 “피식 미소 짓게 (schmunzeln)” 만들지요. 미리 말하건대 이러한 미소 속에는 과거의 유토피아가 사라진 데 대한 절망적인 (?)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일단 시인의 이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943년 튀링겐의 루돌슈타트에서 태어난 시인은 주로 칼스루에 (Karlsruhe)에서 성장하였습니다. 1962년부터 1967년까지 하이델베르크, 괴팅겐,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문학, 철학 그리고 사회학을 공부했습니다. 1964년에서 1965년에 간간이 잡지 “텍스트 + 비평 (Text + Kritik)”의 편집인으로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본드라첵이 전업 작가 그리고 비평가로 일하기 시작한 때는 1967년입니다. 그는 60년대 말 학생운동 당시에 짧은 시 그리고 문장 등으로 세인에게 잘 알려졌습니다. 잡지 슈피겔은 프랑크푸르트의 APO (재야 기구) 사람들과 뜻을 같이 하는 시인을 “논란이 되는 문학 작품을 남긴 최초의 학생 운동 세대”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친애하는 R, 본드라첵의 문학이 60년대를 대표한다고 믿으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물론 그의 시들은 1965년에 여러 앤솔로지에 발표되었습니다. 그렇지만 70년대 초에 60년대의 격변하는 서독의 현실을 시와 소설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60년대와 70년대 사이에 문화적 가교를 바로 세운 시인이 바로 본드라첵입니다. 1969년에 이미 첫 번째 산문집 『어릴 적에 어느 날은 총탄 흉터로 시작되었다 (Früher begann der Tag mit einer Schußwunde)』를 발표하였습니다. 여기서 작가 자신은 “반-화자 (Anti- Erzähler)”로 명명되어 있습니다. 1969에 발생한 그의 일화는 무척 흥미롭습니다. 1969년에 방송극, 「파울 혹은 어떤 듣는 범례의 파괴 (Paul, oder die Zerstörung eines Hör-Beispiels)」로 전쟁 맹인들을 위한 문학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드라첵은 본에 있는 국회 의사당에서 수여되는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노라고 통보했습니다. 왜냐하면 작가는 속성상 국가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본드라첵의 대부분의 시들은 『척의 방 (Chucks Zimmer)』 (1974), 『어떤 다른 사람의 가벼운 웃음 (Das leise Lachen eines andern)』 (1976), 『남자들과 여자들 (Männer und Frauen)』 (1978) 그리고 『최후의 시들 (letzte Gedichte)』 (1980)에 골고루 실려 있는데, 1979년을 기점으로 그의 시집은 도합 10만권 이상 팔려나갔습니다. 특히 그의 산문 장시, 『카르멘 혹은 내가 80년대의 똥구멍인가? (Carmen oder Bin ich das Arschloch der 80er Jahre)』 속에는 자전적 요소가 많이 담겨 있으나, 비평가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습니다. 본드라첵은 1977년에 “소녀와 칼 던지는 자 (Das Mädchen und der Messerwerfer)”라는 연작시 35편을 발표하였습니다. 1999년 자전적인 편지 모음집 『켈리 - 편지들』이 간행되었습니다. 시인은 편지 모음집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합니다. 즉 과거의 자신은 “정치적 문학적 도전자 (politisch-literarischer Provokateur)”였으며, 오늘날의 자신은 “예술의 노예 (Höriger der Kunst)”라고 합니다. 이로써 자신은 남들에게 상처를 가하거나, 남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살아왔다고 합니다. 친애하는 R, 우리 역시 설령 아무 일도 행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타인에게 상처를 가하고, 타인으로부터 상처 입는 존재가 아닌가요? 어쨌든 본드라첵은 70년대 초반에 “팝 시인”으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렸습니다. 평론가들은 최근 소설 『모차르트의 이발사 (Mozarts Friseur)』를 “현대 문학의 틀 속에서 매우 지적이고, 이질적이며, 신선할 정도로 낯선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라고 평했습니다. 일단 시 「자동차 안에서」를 읽어보기로 합시다.

 

우리는 조용히 있었고,

낡은 자동차 안에 쪼그린 채,

라디오 채널을 돌리면서

남쪽으로 향하는

거리를 찾았다.

 

몇몇은 고독으로 인해 우리에게 엽서를 보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결단을 내릴 것을 요구하려고.

 

몇몇은 산 위에 앉았다,

밤에도 태양을 보기 위하여.

 

몇몇은 인간 삶이 사적 내용을

까발리지 않는다고 명시된 곳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

 

몇몇은 모든 혁명보다 더 급진적인

어떤 깨어남에 관해 꿈꾸었다.

 

몇몇은 죽은 영화배우처럼 거기 앉아서

올바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

 

몇몇은 그들이 추구하는 사실을 위해

죽은 게 아니라, 그냥 죽었다.

 

우리는 조용히 있었고,

낡은 자동차 안에 쪼그린 채

라디오 채널을 돌리면서

남쪽으로 향하는

거리를 찾았다.

 

(Wir waren ruhig,/ hockten in den alten Autos,/ drehten am Radio/ und suchten die

Straße/ nach Süden. // Einige schrieben uns Postkarten aus der Einsamkeit,/ um uns

zu endgültigen Entschlüssen aufzufordern. // Einige saßen auf dem Berg,/ um die

Sonne auch nachts zu sehen. // Einige verliebten sich,/ wo doch feststeht, daß ein

Leben/ keine Privatsache darstellt. // Einige träumten von einem Erwachen,/ das radikaler sein sollte als jede Revolution. // Einige saßen da wie tote Filmstars/ und warteten auf

den richtigen Augenblick,/ um zu leben. // Einige starben,/ ohne für ihre Sache gestorben zu sein. // Wir waren ruhig,/ hockten in den alten Autos,/ drehten am Radio/ und suchten die Straße/ nach Süden.) (1976)

 

친애하는 R, 자동차가 무엇을 상징할 것 같습니까? 진보, 운동, 현대성 그리고 자유를 상징할까요 이 시에서 자동차란 학생 운동의 이념들 그리고 학생 운동의 이상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68년도에 데모하던 혁명가들을 지칭합니다. 이들은 1976년의 시점에 뒤늦게 쓰라린 패배를 맛보고 있습니다. 자동차는 이제 “낡”아서, 더 이상 빨리 달리지 못합니다. 자동차의 라디오 다이얼을 돌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시적 화자는 누군가로부터 라디오 방송을 수신하려고 합니다. 삶에 있어서의 새로운 의미는 남쪽으로 향하는” 도로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남쪽은 분명히 완전한 기쁨 그리고 가벼운 향락을 부추기기에 충분한 장소가 아닐까요? 어쩌면 남쪽이란 지정학적 의미로 이해된 게 아니라, 어떤 다른 삶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 사회에서 나타난 강요, 순응 수동적 삶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몇몇은 고독으로 인해 우리에게 엽서를 보냈다” 고독은 분명히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무력 행위 때문에 옥살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편지 속에서 옛 친구들에게 옛날처럼 거사를 일으키라고 요구합니다. 감옥에 거주하는 자들은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지 직접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그들의 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게 감옥에 갇힌 친구들의 항변이지요. 가령 급진적인 조직체에 해당하는 적군단 (RAF) 등을 생각해 보세요. 상기한 내용을 고려할 때 “궁극적”인 “결단”은 다음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젊은이들은 더 이상 평화적인 시위를 하지 말고, 무력을 동원하여 급진적으로 거사를 일으켜야 한다는 내용 말입니다.

 

제 3연에서 산 위에 앉은 자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한 자들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따뜻한 태양 빛 속에서 편안히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태양 그리고 아름다운 삶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밤, 어둠 그리고 사악함 등을 더 이상 투시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따라서 “산 위에” 앉아 있는 자들은 체제 순응적인 인물들로서 과거에 투쟁했으나, 이제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려는 자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제 4연을 바라보세요. “몇몇은 인간 삶이 사적인 내용을/ 까발리지 않는다는 게 명시된 곳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 이 시구는 당시에 발표되었던 비상조치법을 연상시킵니다. 친애하는 R, 비상 조치법은 1968년 5월 30일에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통과되어, 6월 28일부터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내외적으로 위협을 당하고 있었는데, 비상조치를 취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연방의 자유적인 기본 질서, 무력시위 그리고 자연 재앙 등은 당시의 위험 요소로 간주되었습니다. 정부는 비상조치에 관한 법령을 공포함으로써 개개인들의 권한을 어느 정도 제한하게 됩니다. 가령 우편 통신 등의 사생활 보장, 거주 이전의 자유 그리고 자유로운 직업 선택 등의 권한을 생각해 보세요. 개인이 통제되는 사회에서는 사랑 역시 공개적인 사항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비밀 없는 사회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는 자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몇몇은 모든 혁명보다 더 급진적인/ 어떤 깨어남에 관해 꿈꾸었다.” 상기한 내용을 고려할 때 어떤 깨어남은 분명히 적군단 (Die Rote Armee Fraktion)과 같은 테러 행위를 암시합니다. 어떤 깨어남을 꿈꾸는 자는 평화적 저항이라는 좁은 길을 포기하고 무력 그리고 테러를 감행함으로써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하나의 혁명이란 무력을 동원한 체제 전복을 뜻합니다. “여기서 깨어남”이란 한마디로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극단적 인식을 지칭합니다.

 

몇몇은 죽은 영화배우처럼 거기 앉아서/ 올바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 죽은 영화배우는 그 자체 상징적 인물일 수 있습니다. 즉 아무 일도 벌리지 않고, 모든 것을 수동적으로 방관하며, 저항하지 않는 인간형을 가리키지요. 이들은 어떤 올바른 순간을 기대하고 있지만, 스스로 무언가를 감행할 줄 모릅니다. 이들은 누워서 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몇몇은 그들이 추구하는 사실을 위해/ 죽은 게 아니라, 그냥 죽었다.그들은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희생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죽음은 무력 혁명을 일으키는 자들이 추구하는 목표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들의 죽음은 그야말로 헛된 것입니다. 그것은 혁명가의 목표와 연관될 수 없습니다.

 

친애하는 R, 당신은 본드라첵의 시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시인은 다시 한 번 서술합니다. 우리는 조용히 있었고,/ 낡은 자동차 안에 쪼그린 채/ 라디오 채널을 돌리면서/ 남쪽으로 향하는/ 거리를 찾았다.여기에는 시인의 자기비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친구들을 생각하며 체념을 감지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이상 내지 희망을 완전히 파기한 것은 아닙니다. 이 시는 베르톨트 브레히트 B. Brecht의 「바퀴 갈아 끼우기 Radwechsel」을 연상시킵니다. 나는 길가에 앉아 있고/ 운전기사는 바퀴를 갈아 끼우고 있다./ 내가 떠나온 곳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가야 할 곳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바퀴 갈아 끼우는 것을/ 왜 나는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는가?” 어째서 “”는 운전사를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을까요? 그것은 어떤 목표가 시적 자아 앞에 분명히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본드라첵의 경우는 브레히트의 그것과는 엄연히 다릅니다. 시적 화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우리는 어떤 목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과거에 품었던 목표를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품었던 과거의 목표는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표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목표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이 어디서 발견될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낡은 차를 차마 팽개치지 못하고 자동차 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본드라첵은 다음과 같이 술회한 적이 있습니다.나는 이미 당시에 낭만적으로/ 숲 속에 앉아 있었습니다. 모든 꽃들을 증오하면서./ 그리하여 시인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창조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시인 (Dichter)이 되지 못했지만, 그는 스스로 시를 쓰는 작가가 되었다고 술회합니다. 내가 어른이 되어 비로소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희귀한 일입니다. 당시에 단막극, 대화, 비합리적 연극 등이 완성되었지요. 나는 무조건적으로 극장을 위해서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당시에 마구 기록했던 글들은 이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내 기억으로 부모님이 어느 날 내가 쓴 글들을 발견하고, 격렬한 언쟁이 벌어졌지요.”

 

친애하는 R, 본드라첵의 시는 일견 유머러스하고 경박한 것 같이 보입니다. 사실 그의 작품은 지금까지 우리가 주로 대하던 무겁고 암울한 시들과는 대조를 지닙니다. 특히 그의 시가 던지는 위트는 독자로 하여금 무심결에 미소 짓게 만들지요. 그러나 근본적으로 고찰할 때 본드라첵의 문학은 결코 경박하거나 유머러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박하고도 유머러스한 표현 속에는 비극적인 삶 속에 은폐되어 있는 어떤 물음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돈키호테』그리고 에스파냐의 악한소설 (Schelmenromane)들이 처음에는 독자에게 웃음을 선사하지만, 나중에는 슬픈 비극적 절망을 제시합니다. 마찬가지로 본드라첵의 문학도 웃음 속의 눈물, 희극적 요소 속의 비극적 요소를 안겨줍니다. 한마디로 본드라첵의 유머는 시적으로 착색된 페이소스가 아닐까요? 모든 비극적 내용은 -우디 알렌 Woody Allen이 말한 바 있듯이- 시간이 지나면, 희극적으로 전환되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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