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서평) 원시사회는 암반 위에 있고, 문명 사회는 절벽을 기어오르는가?

필자 (匹子) 2015. 8. 9. 11:38

다음의 글은 황해 문화 2012년 봄호 (통권 74호) 414 - 418 페이지에 실린 것이다.

- 김유동 저: 『충적세 문명』 -

                                                                                         박 설 호 (한신대)

 

 

 

 

 

1.

김유동 교수의 『충적세 문명』은 학계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닌 문헌이다. 이 책은 만년을 거슬러 올라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문명사를 천착하고 있다. 이로써 저자는 여러 문화 구조의 특성을 도출해내어 서로 비교하려고 한다. 연구에서 저자가 채택하고 있는 방식은 “사실에 대한 역사학의 고증 작업” 뿐 아니라, “인간의 상상을 동원한 고대 문화의 흔적 내지는 징후 읽기”이다. 왜냐하면 선사 시대의 문화에 대한 검증은 문헌 연구 작업으로서는 무척 힘들고, 게다가 자료 선택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리 말하건대 김 교수의 책은 오랜 숙고와 독서의 과정을 거쳐 집필된, 근래에 보기 드문 역작이다. 특히 어떤 세부적 사안에 대한 논평은 적확하고, 깊이 새겨둘만한 것이다. 책은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되는데, 각 장 사이에는 간주곡이라는 제목 하에 12편의 “문화로 고전 읽기, 고전으로 문화 읽기”가 삽입되어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인간의 문명에 대한 김 교수의 입장보다는, 12편의 간주곡의 글들을 더 높이 평가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독자로 하여금 특정한 문화의 궤적을 자발적으로 유추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양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동양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도덕경이라든가 반야심경 텍스트의 주제까지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필자는 책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문제점들을 비판적으로 기술하려고 한다. 부디 이 글이 『충적세 문명』에 담긴 근본적 입장을 명징하기 밝히고 그리고 이로써 파생되는 여러 가지 견해 차이를 드러낼 수 있다면 좋겠다.

 

2.

『충적세 문명』은 만년의 역사를 관통하는 문화의 구도를 추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가 인류의 역사를

지배소유

로 인한 추락과 파멸의 과정으로 파악한다는 사실이다. 문명의 발전은 인간에게 풍요로움과 편안함을 가져다주었지만, 이는 미국 자본주의의 산업 사회에 이르러 권력과 금력의 수탈 관계로 뒤엉킴으로써 몰락으로 치닫고 말았다는 것이 김 교수의 지론이다. (508쪽) 이러한 시각은 역사에 대한 벤야민 Benjamin과 아도르노 Adorno의 비판적 관점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계기로 지배와 소유의 의식이 극대화되었는가?” 이와 관련하여 저자의 시각은 필연적으로 고대 사회로 향한다. 김 교수는 토인비 Toynbee의 말을 인용하면서, “암반 위에 있는 원시사회”를 “절벽으로 기어오르는 문명사회”와 대립시킨다. (110쪽)

 

아니나 다를까, 김 교수는 고대 사회의 문화 구조에 대한 보편적 규정 작업에 책의 절반 이상을 할애한다. 그렇지만 미래의 전망 내지 희망의 차원에서 언급될 수 있는 미래 사회 내지 목표, 최전선에 관한 논의는 거의 생략되어 있다. 김 교수의 책이 “문화 비관주의”의 의혹을 노출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인지 모른다. 요약하건대 저자는 첫째로 시각의 측면에서는 아도르노 사상의 근거하여 비판적 거리감을 유지하고, 둘째로 연구 대상에 있어서는 원시 사회를 집중적으로 구명하려고 하며, 셋째로 방법론에 있어서는 이른바 세부적 사항 대신에 전체성을 추구하고 있다. 특히 세 번째의 경우는 정신사에 바탕을 둔 연구 방법론의 일환으로서 딜타이 Dilthey의 정신사적 역사 기술의 방식을 유추하게 한다.

 

 

3.

그렇다면 동서양의 고대 문화의 구조는 김 교수의 주장대로 정립 가능할 정도의 보편성을 지니는 것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서양의 고대만 예로 들더라도, 그것은 제각기 다양성을 표방하며, 하나의 특정한 문화는 수많은 이질적 요소로 뒤섞여 있다. 고대 페르시아 내지 메소포타미아의 문화를 보편적 차원에서 몇 가지의 특성으로 요약한다는 것은 위험하고도 성급하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많은 미지의 예외 사항들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바흐오펜 Bachofen에 의하면 서양의 태고 시대에도 모권 내지 모계 사회가 존재하였음을 감안한다면, 서양 문화가 투쟁적 구분을 추구하는 남성 문화이며, 동양 문화가 화해와 조화를 추구하는 여성 문화라고 거칠게 단정 지을 수도 없는 실정이다.

 

중요한 것은 정신사적 방법론이 논의와 무관한 지엽적인 예외적 사항들을 무시한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충적세 문명』에서 도입되는 만년이라는 연구 범위는 너무나 방대하다. 김 교수 역시 광활한 연구 영역을 충족시킬 수 있는 문헌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징후 읽기”의 방식을 추가로 도입하여 고대를 탐색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방법론 역시 엄밀히 따지면 학문의 방식으로 개진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자고로 연구 대상의 범위가 확장되면, 특정한 논의는 어쩔 수 없이 학문적 핍진함을 넘어서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어떠한 시대적 장소적 제한이 주어질 수 없고, 모든 자료 내지 흔적들이 모조리 연구 대상에 편입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제한 없는 자료에서 파생되는 예외적 사항들이 다만 소수라는 이유로 모조리 외면될 수는 없는 법이다.

 

4.

또 한 가지 문제점을 지적해보기로 하자. 그것은 다름 아니라 헤겔 Hegel 철학에 대한 김 교수의 입장이 일방적이라는 사실이다. 김 교수는 칸트 Kant 이후로 주체의 개념이 더 이상 명료하게 해명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헤겔이 언어의 마술을 부려 개념과 사물의 일치,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 절대 정신을 들먹이는데, 이것은 옛것의 속박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성을 신적 높이까지 드높였지만 새것의 부정성이 아직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인간 자체에 대한 회의가 본격화되지 않던 근대인의 낙관주의가 가질 수 있었던 허장성세에 불과하다.” (22쪽 이하) 헤겔 철학에 대한 김 교수의 평가는 그 자체 타당하지만, 일방적이고 편협하다. 그것은 나중에 주체의 개념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침해당하고 포섭되었다는 측면에서 타당성을 인정받아야 하지만 (이는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에 강조되는 입장이다),

 

헤겔의 이론이 추후에 나타난 이후의 현실적 조건에 의해서 결과론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지 모른다. 어째서 김 교수는 헤겔 좌파의 사상적 궤적을 완전히 도외시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포이어바흐 Feuerbach 그리고 마르크스 Marx로 이어지는 사상적 흐름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블로흐 Bloch가 『주체와 객체』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한 바 있는 주체와 객체의 상호 보완에 관한 존재론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결과론적 측면에서 헤겔을 “죽은 개”로 매도하지 말고, “즉자존재는 대자존재와 함께 일원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주장을 철학적 존재론의 역사라는 학문적 차원에서 냉정하게 수용할 수는 없을까

 

5.

태고 내지 고대의 문화 구조로 향하는 김 교수의 시각은 철저히 과거 지향적이다. 실제로 『충적세 문명』에서 저자는 신약을 논하는 자리에서 원시 인간의 세상을 “소유와 지배를 모르던 하나됨의 세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341쪽) 원시 사회는 과연 그러했던가? 대부분 원시인들은

야만의 피 흘리는 전투, 광란의 춤 그리고 깊은 신앙에 근거하는 주술

을 일삼지 않았던가? 태고 시대에 대한 저자의 동경은 케레니 Kerényi, 토마스 만 Thomas Mann, 괴테 Goethe 등의 태고의 자연을 찬양하는 회귀적 갈망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주어진 현실을 회피하고 뜬금없는 숭고함만을 찾으려는 야콥 부르크하르트 Burckhardt의 문화적 도피주의와 연결되고 있다.

 

한마디로 충적세 문명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려는 시도는 궁극적으로 영겁 회귀의 관점 내지 고대 그리스인들이 추적했던 영원한 원초적 상을 “재 기억 Anamnesis”하려는 태도와 같다. 물론 찬란한 황금의 시대의 추적은 -마치 루소 Rousseau가 그러했듯이- 오로지 과거에서 수용할 수 있는 바람직한 특성들을 도출해내어 현재의 현실에 반영하기 위한 차원에서 부분적으로 도움을 줄 수는 있다. 그렇지만 고대 문명에 대한 무조건적 칭송은 현재 삶의 부정적 요소를 외면하게 하고, 자연과 태초를 동경하는 것은 과거지향의 “퇴행”과 같은 정치적 보수주의로 오해받을지 모른다. 찬란한 과거에 대한 애호 내지는 동경은 주어진 현실을 외면한다는 점에서 도피주의의 의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조지 D. 톰슨 Thomson, 크리스타 볼프 Wolf 내지 엥겔스 Engels의 진보적 관점에서의 비판적 시각을 원용할 수 있을 것이다.

 

6.

왜 우리는 멀리서 현대 문명을 부정적으로 고찰해야 하는가? 현대 문명 속에 지배와 소유의 폐해가 도사리고 있다면, 여기에는 치유 내지 극복을 위한 방안은 없단 말인가? 가령 권력과 금력을 논하는 데 있어서 마르크스주의만큼 적절한 대안도 없다. 비록 이것이 19세기의 유럽의 현실을 전제로 파생된 것임을 고려한다면, 사람들은 이상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부분적으로 용인하면서, 미래 사회의 변모 가능성에 관한 질문을 진척시켜나갈 수밖에 없다. 이는 구체적 유토피아의 실현 가능성에 관련되는 물음으로서 결코 회피할 수 없는 난제이다. 이를테면 현대 문명을 논하는 자리에서 머레이 북친 Bookchin의 사회 생태주의라든가 루돌프 바로 Bahro의 근본 생태주의 등과 같은 생태적 담론은 결코 생략될 수 없다.

 

그러나 『충적세 문명』은 이러한 담론에 관해서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물론 저자가 미래를 이야기할 때는 희망을 기도할 수밖에 없으며 (556쪽), 자본주의의 예측 불가능성과 불확실성 자체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논평한다 (528쪽). 그러나 그의 관심은 미래에 있지 않고, 고대의 문명 구조를 연역적으로 밝히려는 노력에 집중되어 있다.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 내지 미래 사회의 삶과 관련된 구체적 논의가 아니라, 처음부터 “역사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라든가 “구원의 관점”이다. (42쪽) 구원은 자연의 개념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한다. 때 묻지 않은, 모든 인위성으로부터 거리감을 지니고 있는 순진무구함으로서의 자연은 저자에게 가장 중요한 대상이며, 태고 시대 내지 고대로 시각을 돌려서 찾으려는 것 역시 이에 대한 원형적 범례로 간주되고 있다.

 

7.

마지막으로 언급할 사항이 하나 있다. 그것은 문학에 대한 저자의 냉소적 견해이다. 문학은 김 교수에 의하면 “허구의 세계”, 실제 세상과 구분되는 “제 2의 세상”을 다룬다. 이로써 문학 연구자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고 한다. 결국 문학 연구자는 학문적 딜레탕트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26쪽) 필자는 이러한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문학은 학문으로 간파될 수 없는 내용을 상상력을 통해서 예견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람들은 중요한 사항을 간과하곤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가능성의 세계를 직관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학문 영역이 오로지 문학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갈망이 주어진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이후의 세계에 어떤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김 교수는 인간의 갈망을 “이룰 수 없는 것을 절망적으로 추구하는 무지개 쫓기”로 이해하지만 (386쪽), 그것은 때로는 세상의 개혁 변화를 선취할 수 있다. 가령 로저 베이컨 Roger Bacon은 중세의 문학 작품을 통해서 안경을 위시한, 황당무계한 사물을 연역적으로 도출해내었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상상은 오늘날 여러 자연과학적 도구로 활용되지 않는가? 근대에 샤를 푸리에 Fourier가 상상해낸 고래와 사자 등의 탈것은 한마디로 자동차와 선박에 대한 선취의 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베이컨과 푸리에가 이러한 상상을 떠올린 배경에는 일련의 문학 작품이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이에 관해서 대작 『희망의 원리』에서 천착한 바 있다. 이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어떤 가능성을 선취해내는 놀라운 매개체가 문학임을 인정하는 게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을까?

 

8.

상기한 사항은 견해 차이에서 비롯하는 어떤 불만일지 모른다. 기실 『충적세 문명』은 문명 전체의 문화 구조를 조망하려는 엄청난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세부 사항에 있어서도 강점을 드러내고 있다. 가령 저자는 사라진 과거에 대한 흔적 읽기의 방법론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모든 논거가 “사실”에 국한 되는 게 아니라, “사실에 관한 사고의 서술”일 수 있다는 것을 솔직히 술회한다. 이로써 저자는 선사시대의 사실적 내용이 이른바 선사시대의 유물 내지 역사적 고증에 근거하는 내용과 어느 정도의 측면에서 구분될 수 있음을 처음부터 용인한다. 여기서 우리는 논의를 전개해나가는 저자의 유연하고 세련된 자세를 감지할 수 있다.

 

나아가 『충적세 문명』은 동양과 서양에서 나타난 지배의 법칙이 서로 구분될 수 있음을 분명히 규정한다. 이를테면 “동양에서는 상하존비의 질서가 엄존하지만 인간성 자체가 부인되지 않는다면, 서양에서는 지배의 법칙이 철저하게 관철된다.”는 식으로 말이다. (114쪽) 간주곡으로 설정된 12개의 단락들은 김 교수의 입장에 대한 논증으로 작용하는 세부 사항들로서 전체적 논거에 도움을 제공한다. 이를테면 인도의 탈속 문화, 노장 사상에 나타난 자연의 법칙,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화 그리고 길가메시 신화에 나타난 문명의 폭력에 대한 저주와 강인한 남성적 영웅주의, 헤세의 황야의 이리 그리고 카프카 문학에 관한 언급은 -비록 필자로서는 근본적 관점과 전체적 시각에 있어서 무조건 동의할 수 없지만- 세부적 사항에 있어서는 인간이 창조해낸 오랜 문화적 궤적관한 인문적 지침을 마련해주기에 충분한 자료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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