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 단상

(단상. 555) 정의로운 판사는 있는가?

필자 (匹子) 2025. 3. 29. 11:19

 

1. 국민은 모두 들러리인가? 모두가 초조한 마음으로 헌법 재판관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왜 국민은 모든 결정권을 몇몇 법관에게 위임하고, 멀거니 이를 쳐다보아야 하는가? 필자는 국민투표가 답이라고 생각한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온갖 잡다한 욕구가 뒤섞인 간접 민주주의의 폐해를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2. 선과 악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민주제가 바람직하며, 군주제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한다. (폴리비오스 그리고 키케로의 국가론을 참고하라.) 그런데 민주제에서는 그릇된 다수가 올바른 소수를 무찌를 수 있다. 군주제라 하더라도 성군은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다. 그러니 정치 제도가 모든 해결책을 마련해주지는 않는다. 제도도 중요하지만, 선을 지키려는 인간의 의지도 중요하다.

 

3. 악법에 저항하는 작가: 동독 작가, 안나 제거스 (Anna Seghers, 1900 – 1983)는 멕시코에 망명하면서 소설 『제7의 십자가』를 집필하였다. 끔찍한 전쟁에 벌어질 무렵, 머나먼 타국에서 그미는 수용소를 탈출하여 저항의 길로 향하는 한 남자의 고난의 행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 이로써 제거스는 독일 망명 문학 그리고 저항의 문학사에 이름을 남겼다.

 

3. 진리를 발설하기 어려운 다섯 가지 전제조건은 무엇인가? 1957년 구동독에서는 출판업자 발터 얀카가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헝가리 민주화 운동 당시에, 요한네스 베허 그리고 안나 제거스의 부탁으로, 헝가리로 가서 위기에 처한 죄르지 루카치를 구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법정에서 비겁하게도 침묵을 지켰다. 이로 인해 얀카 혼자 죄를 뒤집어쓰고, 구금형 선고를 받게 된다. (발터 얀카: 진실을 둘러싼 여려움들, 안삼환 역, 예지각 1992.)

 

4. 억압에 주눅이 들면 모두 마르틴 루터처럼 쫄보가 된다. 도대체 무엇이 강인한 여성 작가 한 사람을 시종일관 침묵하게 했을까? 제거스는 히틀러 정권에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구동독에서는 철저하게 체제 옹호적 태도로 일관하였다. 완강한 국가 권력이 그미의 입에 자물쇠를 채우게 했던 것이다. 그 후 안나 제거스는 단편 소설 「정의로운 판사」를 탈고한다. 마치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 권력에 굴복하였듯이, 그미 역시 구동독 사회주의 통일당이라는 고양이 앞에서 서성거리는 쥐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그미의 단편은 생전에 발표되지 않았다. 원고는 서랍 속에 머물다가, 그미가 죽은 다음 1990년에 비로소 세상에 공개되었다.

 

5. 설령 나 자신이 피해당하더라도 정의의 편에 설 수는 없을까? 소설의 주인공은 예심 판사, 얀이다. 그의 상관인 칼람과 에클라임은 그를 신뢰하면서, 한 가지 사건을 위임한다. 얀은 법정에서 빅토어 가스코라는 사내의 범죄를 심의한다. 가스코는 체제 비판적인 양심범이다. 당국은 사전에 그에게 유죄 선고를 내린 다음에, 판사에게 통보한다. 그러나 판사, 얀는 이를 따르지 않고 피고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결국 판사는 교도소에 갇히는데, 그곳에서 가스코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6. 자유로운 사회에서 판사는 법정의 왕이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독재 치하에서 판사란 당국의 명령을 수동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자에 불과하다. 독재자가 법이고, 판사는 그를 따르는 하수인인 것이다. 이에 비하면 민주 사회의 판사에게는 운신의 폭은 비교적 넓다. 당국의 간섭을 직접적 전달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판사가 공명정대한 재판을 이끄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자기 마음대로 판결을 내릴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모든 판결은 배심원에게 위임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는데, 한국은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지 않고 있다. 판사들은 자신의 권한을 뺏기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7. 판사는 실수로, 혹은 의도적으로 잘못 판결하기도 한다. 피고에게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관대하게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판사에게 문제가 없더라도, 실정법에 하자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판사가 법을 적용하는 일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없는 법을 만들어서 이를 적용하기도 한다는 데 있다. 지귀연 판사가 굥석열을 풀어준 것도 이에 해당한다. 형사소송법에 나오는 날짜 계산을 무시하고, 시간을 계산한 것이다. 이는 형사 소송법 위반이다. 그러나 법관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8. 어떻게 하면 판사의 판결을 비판하고, 잘못된 내용을 시정할 수 있을까? 어째서 일부 시민이 서부 지방법원의 창문을 박살내고, 안으로 쳐들어갔는가? 물론 필자는 이러한 행위를 폭력을 규정하면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폭력 범죄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무엇보다도 물리적 폭력을 증오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수많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판결을 접할 때, 재판정을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은 비이성적 욕구가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게 무조건 잘못일까?

 

9. 판사의 판결을 심의하고 평가하는 상설 기관이 존재해야 한다.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로 검찰은 수사권을 지니지 말아야 하며, 오로지 기소권만 지녀야 한다. (이게 바로 검찰 개혁의 핵심 사항이다.) 둘째로 배심원 제도를 긍정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판사는 실정법을 적용하여 판결을 내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보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배심원 제도를 도입해야 우리는 판사의 횡포를 막을 수 있다. 만약 헌법재판소에서 배심원 제도가 도입된다면, 법관들은 굥석열에 대한 탄핵 심판을 이렇게 오래 질질 끌지 않을 것이다. 

 

10. 법정의 판사들에게는 인간을 법으로 죽일 권리가 없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연법 학자들이 주장하는 공통적 견해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형틀에 묶여서 처형되기 직전에 기기가 작동되지 않아서 두 번의 집행 끝에 두 번 사형 당한 사람도 있다. 그는 두 번 처형 당한 셈이다. 죽산 조봉암 선생을 생각해 보라. 법의 이름으로 처형된 그분은 시간이 흘러 복권되었지만,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대법관들은 오래 살다가 편안히 떠났다.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