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서로박: (2) 블로흐의 카테고리 이론

필자 (匹子) 2025. 2. 22. 11:24

5. 칸트의 카테고리: 칸트가 생각하는 보편적 존재자에 관한 발언은 이성과 관련됩니다. 칸트가 말하는 카테고리란 우리가 모든 지식과 독립적으로, 그리고 모든 지식 이전에 (선험적으로) 취하는 순수한 이해 또는 순수한 지적 개념의 기본 개념입니다. 그것들은 칸트에 의하면 우리에게 주어지거나 "원래", 즉 어떤 경험을 통해서든 얻을 수 있는 사고지만 특정한 경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카테고리는 순수 이성 비판의 초월적 분석에서 자신의 필연적인 인식론적 기능 (“초월적 연역”)에서 파생되어 나옵니다. 12개 카테고리는 4가지의 종속 범주, 이를테면 양, 질, 관계 그리고 양식 등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칸트는 진리가 가능한 판단을 형성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아이디어 조합의 기능적 요소를 포함해야 하는 판단 목록, 다시 말해서 "범주 표"를 개발했습니다. 첫째로 양은 일원성, 다양성, 전체성으로 나누어집니다. 둘째로 질은 현실성, 부정성, 한계성으로 구분됩니다. 셋째로 관계는 실체와 개연성, 인과성과 작용, 행위 주체와 객체의 상호 작용으로 나누어집니다. 넷째로 양식은 가능성과 불가능성, 현존재와 비존재, 필연성과 우연성 등의 구분으로 구성됩니다. 제반 카테고리는 초월적 주체가 의식 (양)에서 발견하는 시각적 이념의 다양성 또는 다양성을 결정하고 구조화하면서, 이를 다른 종속 범주인 질, 다른 현상인 관계, 또는 전체 경험으로서의 양식과 관련하여 배치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칸트는 몇몇 연구자에 의하면 카테고리의 기초가 되는 판단 형식을 체계적으로 도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칸트가 제시한 판단 목록을 초월적 연역 행위에 직접적으로 대입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6. 명사적 요소주의 대신에 역동적 변모의 움직임이 중요하다. 서양의 사상적 논리에는 철학에는 수직 구도의 명사적 요소주의가 자주 발견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서양의 철학은 오랫동안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와 변모의 가르침 대신에 파르메니데스의 불변이라는 가르침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세계의 실험』에서 종래의 철학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카테고리를 고찰합니다. 그의 카테고리는 철학의 기본적 토대와 관련됩니다. 카테고리는 여기서 어떤 아직 완결되지 않은 존재로 파악됩니다. 그것은 객관적 경향성을 고려한 조화로운 관련성 속에서 정해집니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엇이 새롭게 나타날지 추론하고, 명령하며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Zudeick: 61).

 

존재의 카테고리는 변화의 과정을 고려할 때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밝힌 바 있는 정태적 고체의 특징 또한 더 이상 지니지 않습니다. 오히려 카테고리는 현실적 과정에서 나타나는 흐름의 관점에서 파악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모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징적 카테고리는 필연적으로 출현하여 형성됩니다. 만약 현실의 변화에서 오로지 흐름의 특징만을 고찰하면, 우리는 카테고리가 가장 진지한 방식으로 지향하는 바를 무조건 쟁취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카테고리는 끝없이 요청되는 흐름만을 그야말로 열광적으로 포착하기 때문에, 우리는 카테고리가 목표로 하는 관심사를 전적으로 간파하지 못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7. 무엇Was’ 그리고 ‘틀Dass’ 사이의 역동적 관계: 블로흐 철학의 여러 카테고리는 결코 정태적으로 고착되어 있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무엇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현실적 과정의 흐름과 필연적으로 일치됩니다. “카테고리들은 과정 속의 어떤 과도기적인 카테고리로 존재한다. 확실한 것은 오로지 그것들이 어떤 ‘무엇Was’에 대한 어떤 ‘틀Dass’의 관계라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첨가합니다. “카테고리는 전체적인 순서에 따라 설정되는데, 객관적 현실적인, 오로지 이러한 세계 내의 틀 그리고 내용을 서로 연결하는 관계로서의 근원적 범주를 통해서 분명하게 밝혀진다.” (Bloch, EM: 77).

 

카테고리는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해 스스로 관련됩니다. 즉 어떤 “아직 아닌 존재”에 대한 경향성을 지적하는 게 바로 카테고리입니다. 그런데 변화를 위한 개방성으로서의 카테고리는 다음의 사실을 뜻합니다. 즉 이러한 개방되는 현실은 이 경우 비단 하나의 흐름을 통해서, 나아가 출현하게 되는 형체를 통해서 파악됩니다. 이러한 사건의 흐름은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는 그 사실 자체에 승리를 구가하게 됩니다. 즉 “마치 흐르는 강물과 같은 사건의 끝없는 요청이 오로지 열광적 관점으로 인하여 마치 항구와 같은 범주의 요청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조건” 말입니다. (Bloch, EM: 150).

 

8. 카테고리 역시 세계의 변화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모한다.: 블로흐는 무엇보다도 역동적인 카테고리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세계의 내용이 변하면, 세계의 틀 역시 다른 무엇으로 바뀌는 것은 당연합니다. 블로흐의 역동적 카테고리는 그 특징에 있어서 시간적 흐름과 대립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고찰할 수 있습니다. 즉 세계의 변화 과정은 반드시 현실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인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세계의 변화가 원활하게 이행될 수 있도록 유연한 자세를 취하는 자는 바로 인간이어야 합니다. 이로써 세계의 실험은 현실 변화의 “전선Front”에 위치한 인간, 다시 말해서 카테고리의 내용을 파악하여 이를 연속적으로 형성시키려는 자의식을 품고 있는 인간을 전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카테고리의 형성은 모든 역사적 사회적 조건 속에서는 다만 그것만으로 축소될 수 없으며, 여전히 성공리에 끝나지 못한, 개방적으로 계속 이어지는 시도이다. 이는 현존재의 양식 그리고 현존재의 형태를 객관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도출해내고 끌어내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Bloch, EM: 78).

 

9.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관계: 카테고리의 사고는 그 자체 세계의 과정 내부로 개입합니다. 제반 카테고리는 블로흐에게는 서서히 개방되는 세계의 과정에 관한 진술 내지는 발언입니다. 그것들은 현존재의 양식 내부에서 앞으로 향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경향성을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만약 블로흐가 이러한 경향성을 고려하여 보편적인 무엇을 언급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통상적 사고 과정에서 이해하는)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대립 문항이라는 의미로 파악될 수는 없습니다.

 

흔히 우리는 보편성의 개념을 인간 정신에서 산출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현실에서 드러나는 특수성과 개별성을 보편성이라는 영역 속으로 편입시키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편입은 블로흐의 카테고리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개별성이라는 옷은 블로흐에 의하면 옷장에 적합하지 않을 때 가차 없이 예외적인 것으로 파기되는 그러한 물건이 아닙니다. 블로흐는 개별성 그리고 특수성 속에서 진행되는 변화 과정에 대해서 예의 주시합니다.

 

10, 세계의 과정과 경향성은 보편성과 툭수성 사이의 대립을 용인하지 않는다.: 블로흐의 카테고리는 아직 여전히 개방적인 세계의 과정 그리고 앞으로 지시하는 경향성에 관한 보편적인 발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보편성이 논의의 대상이라면, 그것은 전통적 연역의 범례에 해당하는 보편적인 무엇과 특수한 무엇이라는 통상적인 대립적 명제의 의미와는 전혀 관계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간 정신을 하나의 보편적 개념으로 설정하고, 현실에 나타나는 수많은 개별적인 것들을 이러한 보편 개념 속에 종속시키곤 합니다. 만약 개별적인 것들 가운데 보편적 개념에 포함될 수 없으면, 이러한 것들을 하나의 포함될 수 없는 예외 사항으로 논외로 설정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특수성 속에서 진행되는 변모는 우리의 관심사가 되기도 합니다.

 

블로흐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계 규정에 관해서 라이프니츠를 언급합니다. 라이프니츠의 경우 보편적인 무엇은 개별성 앞이라든가 개별성 외부에 위치하지 않고, 개별성 내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서로 동일하지만, 오로지 수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개의 사물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모든 개별적인 것은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그 자체 보편적인 무엇이라고 합니다. 개별적인 것들은 –라이프니츠는 이를 “단자들”이라고 칭합니다.- 연속적으로 우주의 면모를 마치 거울상처럼 다양하게 반사하고 재현함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구상적으로 마치 촛불 하나의 상이 거울로 이루어진 밀실에서 수많은 촛불의 상으로 끝없이 전개되는 상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상은 서로 마주하는 거울 속에서 수많은 상으로 반사됩니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개별성의 변화가 스스로 전복되는 전체적 사회의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