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토피아의 정신은 두 가지 서로 다른 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유토피아의 정신 제2판은 20세기 초의 유럽을 염두에 두면서, 시대 그리고 예술에 관한 명상을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블로흐가 글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이 책 역시 짧은 단상으로 시작됩니다. 블로흐는 예컨대 항아리, 유리 그리고 가구 등과 같은 가시적이고 지엽적인 사물들을 다루면서, 자신의 사고를 단편적으로 개진해 나갑니다. 뒤이어 이어지는 논의는 예술에 대한 개념적인 해명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블로흐는 주어진 연구 대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객관적인 틀로서 양식화하는 사상가가 아니라, 주어진 일상의 사물로부터 깊은 새로움을 도출해내는 사상가에 속한다고 말입니다. 이로써 그는 모든 것을 체계화시키는 루터, 헤겔 등의 서술 방식 대신에, 사소한 무엇에서 깊은 의미를 찾아내는 카발라 신비주의자 내지는 에크하르트 선사의 방식을 학문의 수단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2. 예술의 두 가지 특성: 블로흐는 예술을 철학적으로 논하면서 예술의 두 가지 특성을 일차적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예술의 “목적 형태Zweckform”이며, 다른 하나는 “넘쳐흐르는 예술적 표현 ausdrucksvolle Überschwang”입니다. 전자는 실천적 생산 원칙으로서 예술 작품을 생산하게 된 예술가의 직접적 계기 및 생업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후자는 미적 생산 원칙으로서 작품 속에 훌륭하게 형상화된 예술적 표현을 지칭합니다. 블로흐에 의하면 과거의 예술은 상기한 두 가지 원칙들이 서로 혼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예술적 생산의 계기로서의 목적 형태를 “넘쳐흐르는 예술적 표현”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습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니라 과학 기술의 발전입니다. 기술 문명의 발전은 예술작품의 실천적 생산 원칙 그리고 미적 생산 원칙을 서로 분리하도록 작용합니다. 왜냐면 예술은 기술 발전을 통해서 특정한 사람뿐 아니라, 만인을 위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3. 예술의 역사, 그것은 갈구하는 인간이 찬란하게 만들어낸 유산의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예술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고대 그리스 예술은 행복 추구의 균형감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삶 그리고 엄밀성 사이에 도사리고 있는 이른바 행복 추구의 균형 감각”입니다. 이에 대립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두 번째 고대 이집트의 예술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돌과 같은 기하학적 죽음의 경직된 상”을 열광적으로 추구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유한한 삶을 말하자면 어떤 무한한 죽음 이후의 세계와 동질적인 것으로 파악하려는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예술적인 형이상학적 상의 세 번째 형태가 출현하게 됩니다. 그것은 기독교와 관련되는 특징입니다. “마치 부활과 같은 새로운 변화된 삶을 갈구하는 고딕 형식”이 세 번째 형태라고 합니다. 나중에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리고 중세의 고딕 건축물을 모든 건축의 두 가지 모범적 범례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전자는 죽음 이후의 영생을 갈구하는 정신을, 후자는 상부로 향해 뻗어나가는 생명의 나무의 정신을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4. 변화, 해방 그리고 유토피아: 상기한 사항과 관련하여 블로흐는 표현주의라는 예술 사조를 “고딕의 선험적 정신을 그대로 간직한 하나의 형태”라고 단언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표현주의 그리고 고딕은 자아의 어떤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초월을 강력하게 갈구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한결같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공동체의 기본적인 비밀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변화”, “우리 존재 속에 도사린 비밀” 내지 “우리에 관한 문제” 등은 블로흐의 핵심적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블로흐는 이러한 개념을 거론함으로써 자아라는 협소한 영역으로부터 탈출하고, 부자유로부터 해방(Exodus)되어, 마침내 신을 섬기는 공동체로서의 묵시론적 공동체 내지는 유토피아로서의 자유의 나라로 향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스스로 은폐된 자아는 여전히 자신 속에 숨어 있을 뿐 바깥에서 활개 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상기한 방식으로 해방된다면, 자아는 마침내 인간의 면모를 지니게 되리라고 합니다. 블로흐는 전체로서의 역사를 기존하는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출발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블로흐에 의하면 “마지막 그리스도 형태의 공동체”로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5. 구성될 수 없는 질문의 형체로서의 음악: 블로흐는「음악의 철학」이라는 상당히 방대한 장에서 예술적 장르 가운데 특히 음악의 장르를 강조합니다. 음악은 부자유의 질곡을 벗어나서 해방으로 나아가게 하는 갈망의 고유한 특징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음 자체는 문학에서 나타나는 단어들과는 달리 그 자체 아무런 의미를 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블로흐에 의하면 음악 속에는 어떤 추상적 “논리성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합니다. (Bloch, GdU1: 224). 이미 언급했듯이 음악은 구성될 수 없는 질문의 형체를 떠올리게 합니다. 음이라는 순수성 그리고 빈약한 의미론적 차원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음악은 다음의 사항을 가능하게 합니다. 즉 음악은 오래전부터 어떤 다른 진리를 찬양하고, “구성적 환상”을 떠올리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중세에 천구의 화음은 찬란한 기독교적 세계를 강조하는 음으로 울려 펴졌습니다. 천구의 화음은 이를테면 일곱 개의 음으로 옥타브를 구성하는데, 이는 목화토금수 그리고 태양과 달을 첨가한 일곱 개의 음으로 하나의 옥타브를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블로흐는 특히 독일의 고전 음악을 세부적으로 평가하면서, 모차르트와 바흐의 음악을 거론합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신에 대한 밝은 거부감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악마적인 특징을 드러낸다면, 바흐의 바로크 종교 음악은 기독교의 순수한 열정과 갈망을 반영하도 있다고 합니다.
6. 음악은 너무나 아름다운 양탄자에 비유될 수 있다. 블로흐는 음악에 나타난 세 가지 특징을 지적합니다. 첫째로 음악은 공예품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작곡이 씨실과 날실을 엮어내는 작업이라면, 음악가는 놀라운 예술 작품을 직조해내는 장인(匠人)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개별 음악 작품은 공예품, 이를테면 “양탄자Teppich”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음악은 -마치 남부 독일의 성당의 창문에 비치는 천국의 오색영롱함처럼- 신비로운 페르시아 양탄자의 무늬와 색깔처럼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그렇기에 음악은 블로흐에 의하면 씨실과 날실로 직조된 양탄자라고 합니다. 이렇듯 음악은 우리의 마음을 파고들면서 심금(心琴)을 울립니다. 마치 성스러운 영혼이 애타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갈구하는 신자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듯이, 음악의 선율은 우리의 마음 속에 거문고를 연주하게 하는 것입니다.
7. 음악은 가장 원초적이고 새로운 갈망을 직접 전해주는 장르이다. 둘째로 음악은 흔히 주어진 현실과 무관한 예술적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음악의 장르만큼 주어진 사회 현실적 정황을 반영하는 예술적 장르도 없습니다. 헨델의 오라토리움 속에는 종교 개혁의 이상이 간접적으로 반영되어 있으며, 소나타 형식은 서서히 발전해나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적 정황이 용해되어 있다고 합니다. 쇤베르크의 12음계법은 19세가 말부터 전개된 국가와 사회를 둘러싼 갈등 내지는 어긋난 구도를 불협화음으로 표출하고 있더고 합니다. 이점을 고려하면 음악의 역사는 화음에서 불협화음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요약하건대 블로흐는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원초적이고 새로운 갈망을 직접 전해주는 장르로서 음악을 꼽고 있습니다. 음악이 지향하는 미지의 무엇은 결국 철학의 영역에서 거론되는 “구성될 수 없는 질문의 형체”로 이해될 수 있으며, 나아가 “우리는 우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물음과도 관계됩니다.
8. 문제는 주체의 자연스러운 노력과 희망의 자세이다.: 상기한 내용을 통하여 블로흐는 이러한 문제의 윤리적 인식론적인 입장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블로흐에 의하면 헤겔은 범 논리적 조직 체계를 너무 일찍, 너무 성급하게 완성한 철학자이며, 칸트는 순수 이성, 특히 실천 이성의 제한된 가능성을 서술할 때 존재와 당위의 구분을 너무 확고하게 구분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도덕적 요청의 논리학으로 향한 길 그리고 시대의 진정한 주관적 윤리의 형이상학으로 향한 길 등은 신으로부터 멀리 동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칸트가 가상적으로 떠올린 정언적 명제는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칸트의 정언적 명제 속에는 어쩌면 미래의 희망으로서의 “아직 아니다”가 도사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10. 그것은 너 자신의 문제다. 그렇지만 인간은 여전히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 동물은 기억과 예언 사이에 서성거리지 않습니까?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바라보지 못하는 어떤 맹점(盲点) 속에, 충만한 삶의 순간이라는 어두움 속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너 자신의 문제다. Tua res agitur.”라는 라틴어 속담을 예로 들어 보세요.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철학의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고 합니다. “우리 자신에 관한 질문이 유일한 문제이다. 그것은 가치에 관한 모든 문제를 결합한 것이며, 자신과 우리에 관한 모든 문제가 하나로 요약된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은 철학의 기본 원칙에 대한 궁극적 해명이 아닐 수 없다.”
11. 자유의 나라, 묵시록 그리고 마지막 장소로서의 고향: "유토피아의 정신" 마지막 장에는 카를 마르크스, 죽음 그리고 묵시록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여기서 블로흐는 넓은 범위에서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이 끼친 성과를 높이 평가합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어떤 더욱더 완전한 국가를 낳게 하기 위한 초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블로흐는 마르크스의 무신론적이고도 현세 지향적인 입장 대신에, “자유의 나라”라는 어떤 진정한 형이상학적 이데올로기를 내세웁니다. 바로 이러한 자유의 나라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며,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유의 나라는 묵시록의 특성을 표방하고 유토피아적 의미에서의 마지막 상태를 가리킵니다. 역사 내지는 과정으로서의 세계는 –적어도 마지막에는 절대적 목표로 귀결된다는 전제하에서는- 어떤 절대적인 전체성 속에서 자신의 메타-우주적인 경계선을 분명히 긋게 되리라고 합니다. 상기한 사랑을 고려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블로흐의 사상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하나의 놀라운 싹으로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후의 철학적 작업은 이러한 싹에 관한 사항을 이론적으로 검증하는 과업 내지는 싹이라는 놀라운 착상과 판타지를 학제적 차원에서 증명해내는 과업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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