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근대독문헌

서로박: (2) 괴테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필자 (匹子) 2025. 2. 1. 09:57

 

(앞에서 계속됩니다.)

 

다시 극작품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피게니에는 섬에서 남동생, 오레스테스와 극적으로 재회합니다. 이때 오레스테스는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사실을 그미에게 털어놓습니다. 동시에 그는 비밀리에 토아스 왕을 죽인 뒤 타우리스 섬을 탈출하자고 제안합니다. 오빠의 말을 들은 이피게니에는 오랫동안 고심합니다. 결국 그미의 고결한 성품은 오빠의 음모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피게니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토아스에게 이실직고하면서, 자신이 남동생과 함께 그리스로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청합니다. “만약/ 당신이 올바른 왕으로서 사람들로부터 찬양을 받고 싶다면/ 진리는 그대의 도움으로 그리고 나에 의해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토아스 왕은 거사를 일으키지 않고 모든 사실을 말해준 이피게니에의 솔직한 성정에 감복합니다. 그미가 꾸밈없이 고결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그후 토아스 왕은 이들 남매가 무사히 그리스로 떠나도록 도와줍니다.

 

에우리피데스의 극에서 사건의 축을 이루는 것은 무엇보다도 전지전능한 신이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 권능이었습니다. 가령 이피게니에가 살아서 그리스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신의 막강한 영향력 그리고 신의 은총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괴테의 극은 이와는 다릅니다. 이피게니에의 고결한 인간성 및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가짐이 결국 토아스의 마음에다 관용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동정심을 가득 채우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로써 괴테는 인간 스스로 자신의 인품을 내적으로 완성할 수 있으며,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결단이 얼마든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 내지는 숙명적 결정주의를 극복하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이 처하고 있는 도덕적 굴레는 차제에 인간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를 통해서 벗어던질 수 있는 무엇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지적할 게 있습니다. 괴테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는 셰익스피어 극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를 보여줍니다. 모든 극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셰익스피어 이전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변함없는 특징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에 이르러 주인공의 입장은 극중의 진행 과정을 통해서 능동적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가령 이피게니에는 처음에는 하나의 천진난만하고 성숙되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는 어쩌면 하나의 성숙되지 못한 결함을 보여줍니다. 그미는 가령 선량한 토아스 왕의 구애를 무조건 거부하는데, 이러한 태도가 아직 성숙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토아스의 인간적 품격이 어떠한지를 모르면서 무작정 그를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피게니에는 “오레스테스와 달아날 것인가?” 아니면 “솔직히 고백하여 왕의 선처를 바랄 것인가?” 하는 문제로 깊이 고뇌합니다. 이러한 고뇌는 놀랍게도 그미를 내적으로 성숙하도록 자극합니다. 곻심의 과정을 통해서 이피게니에는 더 이상 세상에 수동적으로 이끌리는 객체가 아니라, 스스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주체임을 깨닫습니다.

 

괴테는 작품을 통해서 독일 고전주의의 이상을 은근히 드러냅니다. 한 인간의 해방은 종교적 미-성숙에서 벗어나게 하고, 결국 사회 정치적 변화에 자극을 가할 수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그리고 스스로 선택하려는 의향을 통해서 발전될 수 있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비록 신화라는 면사포 속에서 추상적으로 드러난 자결권이지만, 사회의 직접적인 변화에 그야말로 간접적으로 자그마한 영향을 끼치는 아비투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결정권은 그 자체 놀라운 것이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결정권이 여기서 그야말로 미세한 가치를 지니는 까닭은 그것이 최소한 스스로 선택한 미상숙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 이피게니에의 자결권은 그야말로 자그마한 가치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도도하게 흐르는 역자의 변화에 한 인간의 자기 결정권은 과연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끼칠까요? 그게 아무리 올바른 발언과 가치 넘치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고 할지라도 오늘날 지식인의 발언은 대부분 무시되는 형국이 아닙니까?

 

1992년 구동독 출신의 작가 폴커 브라운은 「자유 속의 이피게니에」를 발표했습니다. 작품에서 오레스테스와 필라데스는 그리스 상인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이피게니에를 야만의 사회주의의 섬, 타우리스로부터 환락의 땅, 그리스로 데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피게니에는 낯선 고향에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며, 자본주의의 새로운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토아스 왕은 “고르바초프 만세”를 외치지만, 그의 발언 역시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다. 오레스테스는 나치로, 필로테스는 망상에 사로잡힌 전쟁 영웅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노영돈: 자유의 이피게니에 연구 (1), in: 독일문학, 48권 3호, 2007, 52 – 77, Hier S. 58.) 이피게니에가 머무는 땅은 전환기 이후의 독일입니다. 그미를 환하게 비추는 것은 이윤을 추구하는 광고가 넘실거리는 자본의 휘황찬란한 빛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빛은 마치 진실을 은폐하는 흐릿한 광채로 다가올 뿐입니다. 그곳은 과거에는 라벤스부르크의 “유대인 강제수용소 (KZ)” 지역이었지만, 이제는 사치스러운 소비를 부추기는 마트로 돌변해 있습니다. 그미가 처한 현실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지를 상품으로 인지하며, 모든 인간의 꿈이 돈의 자유라는 미명으로 포장된 공간입니다. 이피게니에가 당황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이피게니에는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향수 병자에 불과합니다. 그미는 무엇보다도 지금 전환 이후 시대의, 아직은 동독적이면서도 더 이상 동독적일 수 없는 세계, 또 아직 완전히 서독적이지 못하면서도 벌써 서독처럼 되어버린 세계 무대 위에서 활보하는 이방인입니다. 그러면서 그미는 우리의 세계 연극공연의 연출 중의 일부인 관객들 앞에서 "서로서로 살육하는" 저주받은 아스트리덴 왕가에 속하던 한 사람이지요. 오늘날 이피게니에가 마주하는 것은 가식 내지는 현혹으로 주어진 자유입니다. 자유는 오로지 돈이라는 의상을 걸치고 있을 뿐입니다. 이피게니에는 더 이상 여사제가 아니라, 마트에서 서성거리는 여자 내지는 몸 파는 여자입니다. 그미의 역할이 급격히 변한 것은 당연합니다. 이상과 유토피아를 추구하던 여사제는 새로운 자유 속에서 자신의 몸을 팔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미는 창녀로 전락해 있습니다. 브라운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구애로 무장해제된 여사제는 쾌락과 사랑으로 흥정하면서 생활한다."

 

한국어 논문

-남정애: 계몽에서 야만으로의 추락. 쾨테의 「이피게니에」에서 호프만슈탈의 「엘렉트라」 로, in: 독어독문학, 52권 3호, 2011, 51 – 69.

-노영돈: 자유의 이피게니에 연구 (1), in: 독일문학, 48권 3호, 2007, 52 – 77; 자유의 이피게니에 연구 (2), in: 독일어문학, 15권 3호, 2007, 231 – 255.

-서요성: 독일 고전문학의 전형으로서 괴테의 희곡, ‘타우리스 섬의 이피게니에’에 대한 연구, in: 인문과학 연구, 41권, 239 – 262.

-이숙경: 고전의 수용 사례와 겸계 넘기의 양상들, 이방인 이피게니에를 중심으로, in: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41집, 2019, 117 – 141.

-장제형: 신의 말씀에서 상호 주체의 화행으로, 괴테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를 중심으로, in: 괴테 연구, 34집, 2021, 29 – 61.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