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6. 죽음과 죽임, 극단적 자기 파괴성 어느 날 표도르 베르초벤스키는 샤토프라는 이름의 대학생을 교묘한 방법으로 암살합니다. 나중에 그는 암살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토로합니다. 즉 샤토프가 자신을 당국에 밀고하겠다고 위협하며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발언은 다만 핑계에 불과했습니다. 사실인즉 그는 동지들에게 반정부주의의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무지렁이 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었습니다. 한 인간의 바보스러운 행동의 배후에는 이런 식의 교활한 간계가 숨어 있었습니다.
표도르 베르초벤스키는 자신의 이념을 열광적으로 추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파괴적 이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당시에는 시갈레프라는 독재자가 무지막지한 폭정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러시아의 작은 공동체들은 속수무책으로 사악한 인간에 의해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피해를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표도르 베르초벤스키는 어떻게 해서든 마치 초인과 같은 놀라운 인물이 나타나, 코뮌에 거주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통솔하고 이끌어야 한다는 어떤 이상적인 꿈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진취적 엘리트주의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등장하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생각과 일치합니다.)
7. 기술자 키리코프, 자살의 신격화 현상: 작품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은 젊은 기술자, 키리코프입니다. 키리코프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에 등장하는 주인공 므이시킨 공작과 유사한 인물입니다. 그의 사고는 영원한 조화로움에 관한 황홀한 꿈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키리코프는 “모든 게 선하다.”라는 막연한 갈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키리코프의 이러한 갈망은 “삶이란 고통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라는 지극히 일상적 현실에서 유래하는 인식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인간은 섬뜩한 두려움 때문에 신이라는 하나의 허상을 창안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크고작은 두려움을 떨치고, 삶 그리고 죽음 사이의 차이를 파기해야 합니다.
키리코프는 이러한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두 가지 사항을 내세웁니다. 그 하나는 신의 존재를 거부하고 신의 권능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이 신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 키리코프는 자살을 선택합니다. 자살 행위는 키리코프에 의하면 자신의 의지를 달성하게 하는 최상의 과제라고 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인간 존재를 신으로 격상시키고, 인간과 자연에게 새로운 자극을 가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키리코프는 자신의 이러한 끔찍한 자유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거짓을 고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대학생 샤토프에 대한 암살범이라고 공표한 것이었습니다. 얼마 자나지 않아 사람들은 끔찍한 신비주의의 희생양으로 변한 키리코프의 시신(屍身)을 발견합니다.
8. 경건한 무신론자, 이반 샤토프: 도스토예프스키는 스테판 베르초벤스키와 마찬가지로 이반 샤토프를 에정 어린 시각으로 묘사했습니다. 무신론자, 샤토프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한 여성을 깊이 사랑하고, 자신의 조국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절규합니다. “나는 러시아를 믿어. 러시아의 정통성을 신봉하고 있어. 그리스도의 몸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있어. 그리스도가 황폐한 러시아의 땅에 재림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어.”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지만, 최소한 독실한 신앙심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샤토프는 스타브로긴과 정반대의 특징을 지닌 인물입니다.
샤토프는 설령 신을 거부하는 한이 있더라도, 러시아의 존재를 굳건하게 애호합니다. 이러한 어정쩡한 자세는 결국 그를 몰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맙니다. 사실 샤토프는 이른 나이에 결혼식을 치른 기혼남이었습니다. 어느날 그의 아내는 스타브로긴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 그미는 이를 고백하면서 남편에게 이별을 고한 적이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다음에 샤토프는 아내가 돌아온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때 샤토프는 다시 그미와 함께 백년해로할 생각으로 기쁨에 젖어 있었는데, 표도르 베르초벤스키에 의해서 살해당하고 맙니다.
9. 스타브로긴에게 이용당하는 네 명의 여자들: 스타브로긴 주위에서 그를 애호하는 네 명의 여자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어느 몸집이 작은, 어린 처녀였습니다. 그미는 스타브로긴에 의해 세뇌당한 다음에 온갖 저열한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미는 신을 모독하다가 목숨을 잃고 맙니다. 둘째는 다리를 저는 정신 이상의 여자였습니다. 스타브로긴은 이용 가치를 염두에 두고 그미를 유혹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의 고통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미와 결혼식까지 치릅니다. 그미는 나중에 스타브로긴과 표도르 베르초벤스키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셋째는 리자라는 미모의 여성입니다. 스타브로긴은 그미를 유혹한 다음에 무신론의 사고를 주입시켜 그미를 세뇌합니다. 이로 인하여 리자는 사랑의 기적을 위해서는 러시아 룰렛이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육혈포에 총알 하나를 넣은 다음에 방아쇠를 당기면, 죽음 앞에서의 흥분 상태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미는 허망하게 목숨을 잃게 됩니다. 넷째는 다샤라 이름의 온순하고 후덕한 여성입니다. 그미는 스타브로긴이 사망할 때까지 모성적 긍휼함으로 스타브로긴의 곁을 지킵니다. 의 여성들은 한마디로 거짓된 왕자, 스타브로긴에 의해 철저하게 “가스 라이팅”을 당하는 무기력한 인물들입니다.
10. 긍정적인 인물, 수사 티혼: 소설 속에 유일하게 긍정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사람은 티혼이라는 이름을 지닌 수사입니다. 그는 스타브로긴의 비밀스러운 술수을 꿰뚫어 보면서, 자살이 얼마나 끔찍한 아름다움으로서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지 예리하게 간파합니다. 소설 제3부의 9장은 “티혼에게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소설이 간행되었을 때는 작품에서 빠져 있었는데, 1923년 완결본이 간행되었을 때 실리게 됩니다. 스타브로긴은 티혼을 찾아가서 고해합니다. 이떼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사악한 영혼을 신봉합니다.” 신을 믿지 않고, 자신의 내면의 어떤 존재에 대해 믿음이 간다는 발언이었습니다.
스타브로긴의 고백은 소설 『카라마조프 형제들』에 등장하는 이반의 외침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반이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지만, 믿음이라는 진정성을 포기하지 않는 반면에, 스타브로긴의 마음속에는 메마른 열정과 황량한 자의식만이 자리할 뿐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악령』에서 인간이 어떻게 신을 부정하고, 스스로 신의 존재로 거듭나려고 하는가를 서술하려고 했는데, 「테혼에게서」는 이를 비판적 관점에서 냉정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신의 아름다움이라는 진실 그리고 신과 무관한 아름다움의 거짓은 서로 정반대되는 명제입니다. 이러한 명제는 소설의 근본적인 축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술책과 신비로움에 의해서 치밀하게 직조되어 있습니다.
11. 『악령』은 경건한 무신론의 가능성을 타진한 작품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생 기독교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애타게 갈구했지만, 자신이 참된 기독교인이라고 확신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교회의 밖에서 교회 내부를 들여다보는 낯선 영혼입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처절한 탄식을 터뜨리는 욥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악령』을 집필할 무렵에는 경건한 무신론을 하나의 대안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극단적 아나키스트들은 타인의 삶에 개입하고, 살해하며, 자살을 미화할 뿐이며, 이러한 행동은 인간이 저지를 수 없는 하나의 “발작”에 불과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가지 딜레마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기독교 교회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고, 일반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노예로 전락하게 했습니다. 무신론 역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기된 사상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선(善)의 추구 그리고 경건한 자세로 성령을 받아들이려는 마음가짐은 고결한 제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로써 나타나는 것은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의 경건한 무신론입니다. 신의 존재를 거부하지만, 신앙의 기능으로서의 믿음을 인정하려는 태도 – 그것이 바로 경건한 무신론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한국어 판
(1)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1, 2, 김성호 역, 블루에이지, 2010.
(2)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상 하, 채수동 역, 동서문화사 2017.
(3)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2권, 진형준 역, 살림 2020.
(4)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3권, 박혜경 역, 열린책들 2020.
(5)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2권, 이 철 역, 범우사 2021.
(6)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3권, 김연경 역, 민음사 2021.
(7)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2권, 김정아 역, 지만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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