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탈리아의 문호이자 철학자인 단테 알리기리 (Dante Alighiri, 1265 – 1321)의 『신생Vita nova』은 청년 시기에 완성된 작품입니다. 단테는 피렌체의 귀족 출신으로서 어떠한 교육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습니다. 다만 그가 여러 명의 총기 있는 부유층의 자제들과 함께 수학했다는 사실만 대충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작품의 집필 연도는 1283년에서 1293년이라고 하니 18세에서 28세 사이에 약 10년에 걸쳐서 다듬어진 정갈한 작품인 것은 분명합니다. 『신생』은 특이하게도 시와 산문이 혼합된 작품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작품의 운문은 12편의 소네트, 칸초네 그리고 한 편의 담시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문은 작품 내에서 이야기의 방식으로 삽입되어 있습니다.
사실 기원후 6세기에 살았던 보에티우스Boethius, 480/485 – 524/526)는 시와 소설을 아우르는 복합적인 장르를 과감하게 실험한 바 있는데, 단테 역시 이를 채택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작품, 『신생』의 원본은 유실되고 오늘날 필사본만 전해지고 있는데, 우리는 원작과는 다른 32장만을 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생Vita nova”이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청춘의 새로운 시작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과거와는 다른 혁신적 삶을 지칭합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삶에서의 “봄(春)”의 시간을 가리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활 내지는 갱생이라는 기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2. 단테는 과거와 다른. 혁신적인 삶의 의미를 기독교 정신의 순수함을 되찾는 생활방식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작품은 당시에 새롭게 등장한 주제 및 문체를 따르고 있습니다. 친구인 귀도 카발칸티 (Guido Cavalcanti, 1258 – 1300)는 “달콤하고 새로운 문체 dolce stil nuovo”를 선호하면서 작품을 완성했는데, 단테는 이를 적극적으로 답습한 것 같습니다. 단테는 작품, 제3장을 카발칸티에게 헌정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신생』의 주제는 기독교적 가르침과 관련됩니다. “은총은 사랑에 의해 성취된다. La grazia è piena d'amore”. 이른바 기독교 사상이 작품 배후에 배여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인공 “나”는 베아트리체라는 소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는 감각적 차원에서의 애호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에는 아무런 직접적인 응답이 없습니다. 베아트리체는 현실에서 마주치는 실제 현실의 처녀인 것 같지만, 오히려 이상화된 여성성으로 이해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사랑의 신, 아모르는 사랑을 전하는 사절 내지는 중개인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찬란한 순화된 사랑을 가능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인인 “나”에게 속내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힘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3. 제1권은 “새로운 삶이 시작되도다.Incipit vita nova”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단테 알리기리가 청년 시절에 체험했던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1274년 9세의 단테는 피렌체의 어느 곳에서 아름다운 소녀와 마주칩니다. 그미 역시 같은 나이였는데, 붉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습니다. 단테는 사랑의 두근거림으로 인해 꿀 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그는 “너를 통해서 성스러운 모습이 출현하였다.”라고 기술합니다. 베아트리체는 어원에 의하면 “축복을 안겨주는 처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9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베아트리체는 다시 시인의 앞에 나타납니다.
이번에 그미는 두 명의 하녀를 대동한 채 햐얀 백합의 옷을 걸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반가운 듯이 단테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를 건넵니다. 베아트리체는 어느새 고결한 처녀의 모습으로 출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인사saluto”는 놀랍게도 “구원salute”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단테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황급히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의 마음은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잠시 정신을 잃고 잠이 들었는데, 꿈은 그야말로 소름 끼치는 것이었습니다. 꿈속에서 아모르 신은 불그레한 얇은 잠옷을 입고 잠이 든 여인의 손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미가 깨어났을 때 아모르 신은 단테의 심장을 건네면서 먹으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4. 드디어 베아트리체는 아모르 신과 함께 하늘 위로 날아갑니다. 이때 “나”는 그미가 바로 자신이 애타게 갈구하던 “구원의 여성donna della salute”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뒤이어 단테는 자신의 문우에게 소네트 한편을 헌정하는데, 이것은 바로 “충직한 사랑fideli d’Amor”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3장). 이어지는 장면은 거대하고 찬란한 교회입니다. 단테는 거기서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렇지만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그 지역을 다스리는 낯선 여성의 면모였습니다. 말하자면 사랑하는 베아트리체의 모습은 낯선 여인의 면모와 이중적으로 겹치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신 아모르는 시인의 내면에 일종의 사랑이라는 신경 전달물질을 안겨줍니다. 이때 단테는 그미에게서 은폐되어있는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수년 동안 그는 서정시를 집필하여 그미의 아름다움을 찬미합니다. 그런데 그가 쓴 연애 시는 비밀리에 베아트리체로 향하고 있습니다.
5. 제7장과 제8장에는 탄식의 시편들이 얼기설기 모여 있습니다. 시인이 사랑하던 여인은 마치 세상을 등지고 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느 도시에서 이름 모르는 처녀가 안타깝게도 유명을 달리했는데, 시인은 이들의 죽음을 애타게 서러워하면서 슬픈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인의 처절한 만가(挽歌)는 다른 한편으로 고찰할 때 베아트리체와의 오랜 이별을 애통해하는 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시인은 두 여성의 죽음에 자신의 서러움을 드러내지만, 여기에는 베아트리체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이 은밀하게 함축되어 있습니다.
제9장에서 시인이 그 도시를 떠나려고 했을 때 아모르 신은 다음과 같이 명령합니다. 즉 단테에게는 자신의 감추어진 사랑을 달랠 수 있는, 새로운 수호 여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은 베아트리체일 뿐, 자신을 수호하는 여인이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마음을 추스르면서 사랑의 신의 뜻에 따르기로 합니다. 제10장에서 베아트리체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단테의 절박한 그리움을 전해 듣습니다. 그에게 자선(慈善)의 표시로 인사의 편지를 보낼까 하다가, 그렇게 행하지 않습니다.
6. 이때부터 시인에게 완전한 정신적 사랑의 길이 펼쳐집니다. 단테는 사랑의 신과 언쟁을 벌입니다. 아모르 신은 시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인사의 편지를 보내지 않은 것은 두 사람 사이의 불필요한 갈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단테가 애타게 갈구하는 사랑은 엄밀히 따지면 현혹에 불과한 것이며, 성급한 만남은 베아트리체의 정신력만 소모하게 할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모르 신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제 더이상 두 남녀 사이의 숨바꼭질을 벌이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간접적으로, 다시 말해 비-개인적 차원에서 사랑을 추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14장에서는 결혼식의 축제가 거행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선남선녀가 집결해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베아트리체 역시 착석하고 있었는데, 시인을 뚜렷이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단테는 무척 당황스러워하며 그미의 눈길을 황급히 피합니다. 여인들이 조소를 터뜨렸을 때, 그는 죽음의 가장자리로 황급히 도주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어지는 장은 단테와 베아트리체 사이의 만남을 거론합니다. 연인들의 만남은 한편으로는 시인이 애타게 동경하는 갈망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으로 가득 찬 위험 신호와 다를 바 없습니다. 제18장에서 하나의 해결책이 마련됩니다. 즉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은 구원을 기약해주는 현재에서의 만남이 아니라, 오로지 시작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성취될 뿐이라고 합니다. 예술적 행위는 지금 여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찬양하는 일인데, 시인에게 행복감을 안겨준다는 것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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