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18. 조아키노가 파악한 성령의 본질 (2): “위로하는 자”라는 표현은 성령이 수행하는 고유한 임무를 포괄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령은 나중에 다시 언급되겠지만 “피의 보복자γοηλ”를 지칭합니다. 그분은 위로하는 자가 아니라, 복수하는 소송인입니다. 다시 말해 부정한 세상에서 정의로움을 위하여 부정과 죄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바로 “원고”로서의 성령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성령은 판관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은 오로지 최후의 심판, 다시 말해 마지막의 재판을 통하여 모든 사항에 대해서 정의롭게 판결을 내리는 임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분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무죄를 입증하고 그들의 넋을 기릴 뿐 아니라, 죄악에 대한 진범을 가려내어, 그에게 정당한 죗값을 선고하는 정의로운 판관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성령은 “피의 보복자”로 번역되어야 하며, “최후의 심판에 참석하여 정의로운 판결을 요구하는 소송인”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근본적으로 고찰할 때 언젠가 테르툴리아누스가 “진리의 정신”이라고 해석한, 조로아스터 종교의 “보후 마노Vohu Mano”에 대한 사고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때로는 “보후 마나”로 표기되는 보후 마노는 “선한 목표라는 어원을 지니는데, ”신의 섬광Ahura Mazda“과 함께 죄악을 척결하고, 선을 확장하는 존재입니다.
19. 조아키노의 사상적 영향 (1): 조아키노의 천년왕국설에 근거한 종말론 사상은 단테 알리기리에게 영향을 끼쳐서 그로 하여금 『신곡』을 집필하게 하였습니다. 조아키노의 사상은 한편으로는 중세에 이단 운동, 신비주의에 근거한 평신도 운동에,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의 계몽주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것은 폭정과 가난이 끊이지 않던 기나긴 중세의 시대에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에 이어졌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언젠가는 찬란한 신의 나라가 도래하리라는 휘황찬란한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여기 그리고 지금hic et nunc” 찬란한 지상의 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주었습니다.
더욱이 천년왕국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빛의 나라”를 저 세상으로부터, 다시 말해 (내세에서 위안을 찾는) 피안의 세계로부터 역사 속으로 끌어들였으며, 실제의 현실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비록 조아키노의 ‘빛의 나라’가 역사의 마지막 상태에서 비로소 출현하는 국가라고 하지만 말입니다. 특히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사항은 성령을 중시하는 조아키노의 혁명적 믿음입니다.
성령에 대한 기대감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권력자 (참주 그리고 교황)으로부터 등을 돌리도록 작용했습니다. 성당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향을 피우며 성령을 기다리는 종교적 생활방식은 중세 이후에 평신도 운동 내지 기독교 신비주의 사상으로 발전했습니다. 거대한 권위를 내세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주의에 대한 불신 그리고 혼자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은 궁극적으로 조아키노의 천년왕국설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 조아키노의 사상적 영향 (2): 조아키노의 사상은 그밖에 러시아 정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이유는 러시아 교회가 스콜라 학이라든가 러시아 정교의 최고 관청에 의해서 간섭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아키노의 사상이 러시아 전역에 널리 퍼져서 동지애를 끓어오르게 하고 재림의 이론을 강화시킬 수 있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이로써 러시아에서는 기독교적 낭만주의로서의 조아키노 사상이 찬란하게 만개하게 됩니다. 알렉산드르 블로크Alexandre Blok는 「열두 명의 행군」이라는 시를 썼는데, 여기에서는 혁명을 주도한 붉은 영웅으로서의 그리스도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조아키노의 사상은 기독교의 또 다른 사회적 원칙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를 결코 노예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블로흐 2004: 1046). 예언자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습니다. “성당 사람들은 제단만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는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쓰라린 배를 안고 굶주리고 있도다.” 이러한 탄식은 조아키노에게 연결되었으며, 결국 나중에는 뮌처의 농민 혁명으로 발전됩니다.
21. 조아키노의 사상적 영향 (3): 조아키노는 당시의 교회의 제반 정책을 은근히 비난하려고 했습니다. 12세기까지 교회는 정치적으로는 권력자, 경제적으로는 상류층의 입장만을 수용하여, 이를 기독교의 질서로 공언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언제나 기독교의 강령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존재로 전락해 왔던 것입니다. 특히 조아키노의 관심사는 고위 수사들이 품고 있는 당동벌이 (党同伐異)의 관점이었습니다. 교회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과 다른 인종, 자신과 이질적인 견해 지닌 자들을 적으로 규정하며, 처벌해 왔습니다. 가령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경우에도 유대인들에게 전파될 수 없다는 편견 내지는 몽니가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와 관련하여 해방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Johann B. Metz는 조아키노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습니다. 즉 두 번째 성자의 시대와 세 번째 성령의 시대 사이의 전환점은 바로 아우슈비츠의 대학살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종교, 다른 인종에 대한 기독교의 편집적인 성향은 수정되어야 마땅하다는 게 메츠의 지론입니다. (Metz: 123). 메츠에 의하면 다음의 사항을 깨닫는 게 무척 중요하다고 합니다. 즉 내 마음속에 담긴 영원한 아이로서의 성령이 우리의 호흡을 통해서 당신의 성스러운 영혼이 될 수 있으며, 당신의 성스러운 영혼이 우리의 호흡을 통해서 나의 성스러운 영혼이 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메츠의 발언이 옳든 그르든 간에 우리는 그의 주장에서 조아키노의 사상적 편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2. 이단으로 처형당한 종파 사람들은 기독교 정신의 꽃이다: 조아키노의 사상은 중세에 수많은 이단자들에게 찬란한 희망의 횃불을 비추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가난과 폭정에 시달리면서 더 나은 삶을 열기 위한 새로운 믿음을 추구하기 위하여 작은 모임에 가담하곤 하였습니다. 이로써 결성된 것은 다양한 종파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종파들을 한결같이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모임은 주어진 질서를 의심하고, 위로부터의 간섭이 없는 새로운 방식의 질서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이단자로 몰린 사람들은 어디론가 피신하면서도, 막다른 곳에 이르러 체제파괴적인 자세로 격렬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단자들의 비참한 최후로 인하여 기독교의 가장 귀중한 가치와 지조는 다시금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살을 에는 고통의 고문 그리고 벌겋게 달아오른 화형대의 불길은 설령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기독교의 믿음만은 꺾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에른스트 블로흐는 중세의 역사에서 속출한 이단자들의 삶 그리고 그들의 순교를 기독교 사상사에서 결코 시들지 않을 찬란한 꽃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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