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6.
테오 오버벡은 연구소 소장 직으로 일하는 리프셔 교수를 찾아가서 문학상 찬사의 글에 관해서 상의합니다. 리프셔 교수는 사회주의 통일 당(SED)에서 막강한 힘을 지닌 자입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문학 평론가로 활동한 주인공의 문학적 판단을 처음부터 끝까지 무시합니다. 그는 주인공이 어떤 주관주의의 맹목성에 침잠해 있다고 말하면서, 힐난합니다. 주인공은 교수의 말에 몹시 실망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수의 말을 수용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만약 대들면서 따지면, 연구소에서 일하는 직책마저 상실하리라는 것을 주인공은 잘 알고 있습니다. 슈스터의 소설을 끝까지 비판하며, 찬사의 글을 쓰지 않으면, 주위로부터 고립되거나, 당국으로부터 체제 비판의 평론가라는 낙인이 찍힐지 모릅니다. 결국 테오 오버벡은 자신의 주장을 접고, 교수의 조언을 따르기로 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에도 없는 찬사의 글을 써서 문학상 수상식에 참여하기로 작심합니다.
이때 그는 자신이 마치 노예 같다고 여기면서 자학합니다. 생각과 달리 행동해야 하는 데 대한 적개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방식을 고안해냅니다. 그것은 주인공이 남들이 보든 말든 간에 두 개의 서로 다른 짝의 신발을 신고 수상식장에 참가하는 일이었습니다. 색상도 다르고 모양도 다른 두 개의 신발 – 그것은 심리적 투사라는 방어기제 내지는 앙갚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는 특히 작가의 이름이 슈스터, 즉 “신발 제작자Schuster”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참으로 놀라운 패러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인공은 겉으로는 수상 작가를 칭송하지만, 속으로는 그를 죽일 듯이 비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유치하고도 졸렬한 방식으로 표출된 적개심의 분출이었습니다.
7.
이레네는 약 한 시간 늦게 수상식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귀가한 다음에 두 사람은 서로 심하게 싸웁니다. 아내가 아직도 슈스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로써 주인공의 질투심은 슈스터에 대한 노여움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부부의 17세 나이의 딸, 코르넬리아는 소설가, 파울 슈스터에 대해 연정을 품은 채 그와 사귀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이레네는 평소에 어떻게든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항변합니다. 주인공 역시 딸이 거의 아빠뻘 되는 장년의 사내와 사귀려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주인공이 이레네만큼 두 사람 사이를 격렬하게 반대하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남녀 관계에서 나이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의 놀라운 비밀이 백일하에 드러납니다. 알고 보니 17년 동안 키웠던 딸, 코르넬리아는 친딸이 아니라, 이레네와 슈스터 사이에서 태어난 혈육이었습니다. (Tunner: 81). 이레네는 슈스터와 헤어질 무렵 임신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남편에게 이 사실을 숨긴 채 부랴부랴 결혼식을 치른 것이었습니다. 필자는 다른 글에서 거짓과 위선이 얼마나 끔찍한 악영향을 초래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헨릭 입센의 극작품 「유령」으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프로이센 속담에 “더러운 빨래는 몰래 빨아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레네의 위선과 거짓이 결국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게 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8.
작가 드 브륀은 사건에 대해 냉정한 거리감을 취하면서 모든 것을 아이러니하게 풍자합니다. 이로써 구동독 사회에서 문학상 수상은 –청마 유치환(柳致環, 1908~1967)이 일갈한 대로- 수상자를 위한 게 아니라, 수여자를 위한 것이라는 쓰라린 진리를 깨닫게 해줍니다. 문학상 수상은 때로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단체, 사회 그리고 국가의 명예와 체면을 위한 수단으로 작용합니다.
그밖에 또 한 가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모든 사회적 행위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내밀한 사생활과 결착되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사적privat”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빼앗다privare”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사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은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관습, 도덕 그리고 법을 동원하여 소시민들이 누릴 수 있는 사랑의 행복을 갈취하기 때문입니다. 주디스 버틀러와 미셸 푸코가 사생활과 관련하여 “성 정치politique sexuelle”를 논하려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과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 없는 소시민들이 행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일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귄터 드 브륀에 의하면 개개인의 사랑의 삶을 앗아가고 방해하는 국가의 폭력에 있습니다.
참고 문헌
- 박설호: 사회주의의 비더마이어, 귄터 드 브륀의 『새로운 영광』, 실린 곳: 박설호: 실패가 우리를 가르친다. 통일 전후의 독일 소설 연구, 열린책들 2013년, 129 – 138.
- Bellermann, Eberhart Horst: Gedankenreich, Engelsdorfer Verlag: Leipzig 2004.
- Bruyn, Günter de: Preisverleihung, Frankfurt a. M. 1973.
- Melchert, Rulo: Literaturexkurse in einem Roman, in: Sinn und Form, 1973, H. 6. S. 1311 – 1314.
- Reich-Ranicki, Marcel: Ohne Rabatt. Über Literatur aus der DDR, Berlin 1995. S. 158 – 167).
- Tunner, Erika: Wem geben wir die Preise?, Text und Kritik, Bd. 127, Günter de Bruzn, München 1995, S. 79 –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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