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7. 아우구스티누스의 삶 (4): 387년 부활절의 밤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밀라노에서 기독교인으로 세례식을 올립니다. 그후에 그는 가족들과 친구들과 북아프리카로 이주할 계획을 세웁니다. 당시 카르타고는 로마 제국과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388년 말에야 비로소 그는 카르타고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도착 직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생을 기독교에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391년에 그는 히포로 떠나 그곳의 사원에 머물게 됩니다. 394년 아우구스티누스는 발레리우스로부터 주교직을 하사 받아서 죽을 때까지 사제로 일하였습니다. 그는 기도와 함께 청빈한 삶을 살아가면서, 저술 작업에 열중하였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기독교의 사상에 첨예한 특성을 부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아우구스티누스로서는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마니교, 몬타우스, 도나투스, 펠라기우스 등의 사상의 근본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8. 아우구스티누스의 개종의 의미: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도 중대한 의미를 지닙니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을 추구함으로써 느끼는 행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선하고 좋은 것들은 인간에게 완전무결한 행복을 마련해주지 못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선은 오로지 완전무결한 존재로서의 신에게 집중하는 노력을 통해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헬트: 412). 지금까지 마니교는 악을 육체적인 것으로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것은 인간의 오관을 통해서 얼마든지 기쁨을 느끼게 해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성을 무작정 죄악으로 못 박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자신의 힘으로 선과 악을 다스릴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어떤 완전한 선, 즉 신의 의지를 필요로 합니다. 완전한 선의 의지를 지닌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을 통해서 가장 훌륭한 선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9.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나타난 구원과 죄: 자고로 인간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의하면 제 아무리 도덕적으로 엄격하게 산다고 해서 구원받지는 못합니다. 말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를 놓고 기독교 인본주의를 표방하는 펠라기우스와 치열하게 논쟁을 벌인 바 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영국에서 금욕적으로 살아감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달리 진리를 찾으려는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를 중시했는데, 이는 니사 출신의 그레고리우스Gregor von Nyssa의 가르침과 매우 유사합니다. (남성현: 328). 그런데 도덕적으로 엄격한 삶을 영위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신의 은총을 받는 일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혼자서 선과 악을 다스리거나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오로지 신의 도움, 즉 신의 은총을 통해서 선과 악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종국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구원될 수 있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었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고찰할 때 문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죄의 개념에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를 두 가지 사항으로 설명합니다. 그 하나는 죄가 신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데에서 비롯하며, 다른 하나는 인간이 현세에서 성적 욕구를 떨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롯한다는 것입니다. (누스바움 III. 1009). 그런데 원죄는 상호 연결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의 성적 욕망은 『신국론』제 14장에 의하면 순수한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신에 대한 순종을 저버렸기 때문에 통제 불가능한 성욕을 지니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Wills: 135f).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입장은 수직구도 그리고 성적 불평등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현대적 관점에서 하자를 드러내는 것은 사실입니다.
10. 『신국 론』에 영향을 끼친 문헌들: 『신국 론』은 총 22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책으로서 기원후 413년에서 426년 사이에 집필되었습니다. 22라는 숫자기 히브리어의 알파벳의 수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끼친 유대주의의 영향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신국 론』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년의 시기에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완성한 자신의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첫 번째의 10권은 기독교가 과연 로마의 황폐화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다른 종교가 로마에 끼친 끔찍한 영향 등을 비판적으로 추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교도의 신학적 입장입니다. 키케로는 자신의 책 『국가론De re publica』의 제 5장에서 국가의 이상을 정의내린 바 있는데, 이 문헌에서 키케로는 스키피오를 빌려서 공화국은 “공개적 사안res publica”, 즉 인민의 문제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공화국은 이성을 지닌 다수의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공동의 사랑이라는 객체에 해당하는 정신적 가치에 참여함으로써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Servier: 64).
11. (부설) 키케로의 국가에 관한 논의: 여기서 잠시 키케로의 『국가론』을 개관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키케로는 플라톤처럼 어떤 이상 국가의 모범적 범례를 설계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의 가상적인 상으로서의 바람직한 국가를 연역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에 키케로는 로마 국가 자체를 하나의 이상으로 설정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관심사는 로마국가의 형성, 국가의 성장 그리고 로마의 건축과 로마의 문화 전체를 경험적으로 서술하는 작업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키케로는 군주제, 관료제 그리고 민주제를 차례로 논하면서, 이들의 절충적 혼합 형태를 최상의 지배 체제로 규정합니다. 가령 “왕의 지배regnum” 하에 다수의 “과두 정치oligarchie” 그리고 “인민 공의회civitas popularis”의 혼합적 정치 형태가 절충적 혼합 형태라고 명명될 수 있습니다. 키케로의 이러한 입장은 처음부터 추상적으로 바람직한 이상 국가를 설계하는 플라톤의 시도와는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경험론적으로 추적한 최상의 국가의 건설 가능성에 관한 논의와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Freyer: 71).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상의 국가를 수립하는 일을 “인간 삶에서 선을 추구하는 도덕적 목표”와 동일시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정치학』제 7권과 8권에서 논의되는 사항으로서, 국가의 법이 어떠한 이유에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국가가 어떻게 부흥하고 쇠망하는가? 하는 물음과 관련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최상의 국가의 내적인 비밀은 다양한 법 규정 속에 담겨 있다고 합니다. 다양한 법 규정 속에 혼재되어 있는 참된 정수를 발견해내려면, 사람들은 개별적인 법령들을 통폐합하고, 부족하고 잘못된 것들을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약하건대 키케로의 『국가론』은 바람직한 최상의 국가에 관한 모범적 범례를 추상적으로 추적하는 글이 아니라, 로마 국가의 시스템에 관한 경험론적 서술에 국한된 것입니다. 바람직한 국가의 상에 관한 이후의 학자들의 입장은 플라톤의 모델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 모델에 기준을 두고 있습니다.
12. 정의로움과 국가의 존재: 아우구스티누스는 국가의 존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정의를 내세웁니다. “정의Justitia”는 철학적으로 정해진 도덕적 질서이며, “법ius”은 실제의 권력자가 활용하는 잣대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의가 없는 곳에서는 법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로마의 역사는 불행한 사건의 연속으로 점철되었다고 합니다. 로마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상 국가가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에는 처음부터 정의로움이 자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로마 제국은 마치 카인과 아벨의 신화처럼 로물루스의 형제 살인에 의해 건립된 나라라고 합니다. 기원전 4세기에 로물루스는 자신의 친동생인 레무스를 살해하고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이 나라가 바로 로마였습니다.
13. 기독교의 평화주의와 로마 제국의 변화: 아우구스티누스는 형제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지상에 존재하는 나라들의 유형적인 특징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도래한 뒤부터 로마에서의 전쟁과 살육 행위들은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가령 아우구스티누스는 게르만족이 기독교를 신봉한 뒤부터 타민족을 더 이상 침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마찬가지로 로마인들 역시 기독교가 합법적으로 용인된 이후로 과거와는 다른, 다소 평화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의 고결한 힘이라고 합니다.
이 점을 고려하면 로마 제국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기독교 전파에 기인하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로마 제국은 하루아침에 무너진 게 아니라, 300년 동안 서서히 세력을 잃어갔습니다. 비잔틴의 동로마 제국이 존재했으므로, 로마 제국의 순식간의 몰락을 언급하는 것 역시 무리입니다. 1. 로마 제국의 몰락이 외부 민족의 잦은 침입, 2. 로마 인민들의 납 중독 현상, 3. 로마제국 내의 권력 갈등, 4. 방만한 운영으로 인한 재정 파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Demandt: 595).
14. 로마 제국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모순적 입장: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가지 사항을 강조합니다. 즉 로마 제국은 이교도의 신들 그리고 이교도의 운명에 의해서 축조된 게 아니라, 기독교에 의해 어느 정도 훌륭한 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교도의 신들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신적 존재라고 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무지몽매한 사람들에 의해서 막연히 전지전능한 분으로 추앙되었을 뿐입니다. 이교도의 신들은 역사적으로 어떠한 실질적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설령 이교도의 신들이 실제 현실에 영향을 끼쳤다 하더라도, 이러한 영향들은 아무런 일관성 없는 신적 권능에 의해서 산만하게 흩어진 채, 기이하게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근본적 토대를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 지향적인 로마인들을 어느 정도 평화적인 기독교인들로 바꾸어놓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로마 제국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모순적 특성을 드러냅니다. 로마 제국은 한편으로는 사악한 살육과 전쟁으로 광분하는 국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사상과 믿음으로 발전될 수 있는 국가라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러한 견해를 로마 권력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타협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 제국을 “신의 국가”와 “지상의 국가”의 카테고리에 편입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로마 국가는 오히려 이것들의 중간 형태인 “자연 국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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