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고대 문헌

서로박: (1)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론'

필자 (匹子) 2024. 9. 20. 11:43

1. 기독교와 로마제국: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Aurelius Augustin, 354 - 430)와 그의 대표적 저작물 『신국론De civitas Dei』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살았던 시기는 매우 어수선했습니다. 비록 기독교가 323년에 공인되었다 하더라도, 기독교 교회는 간신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기원후 410년에는 이교도 민족인 “서 고트”인들이 로마를 침공하였습니다. 비록 거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전쟁은 로마 도시를 상당부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때 로마인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고대의 신들을 더 이상 숭배하지 않고, 기독교 유일신을 신봉했기 때문에 찬란한 로마가 몰락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로마의 쇠망의 이유를 찾으려고 했는데, 상당수가 기독교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로마 제국의 내부적 취약성을 중시하는 이러한 입장은 나중에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이 『로마제국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1776 – 1798)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기독교가 로마 제국을 쇠퇴하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로마 제국은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용병들의 반란이라든가, 동로마 제국과의 정치체제의 결별 그리고 게르만 족의 침입 등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Nippel: 25). 그밖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로마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인 이유로서 정복 전쟁 이후 노예 계급이라는 값싼 노동력의 고갈을 언급하였습니다. (전성우: 324).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 론』을 집필하게 된 까닭은 로마의 침체 현상이 기독교 때문이라는 견해를 근본적으로 일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 사도 바울과 영지주의 신앙: 예수가 사망한 다음에 사도 바울은 기독교 교회를 견고하게 만들기 위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원시 기독교의 사상을 상당부분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권력과 타협할 필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교회가 살아남으려면 권력자 그리고 부자들의 박해 내지 탄압을 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사상을 액면 그대로 내세우지 않고, 약간 변화시킬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원래 예수 그리스도는 묵시록을 신봉하면서 자연의 어떤 대재앙에 의해 새로운 나라가 탄생하리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주어진 사악한 현실에 대한 반대급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주어진 현실이 사악하게 된 까닭은 권력자가 불법을 자행하며, 부자들이 재화를 자신의 소유로 끌어 모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폭정과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거대한 파국이 도래하여 가치 전도된 세계가 몰락하리라고 예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믿음을 그대로 계승할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자신이 세계 전복에 관한 예수의 믿음을 고수하면, 이는 체제파괴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권력자는 이를 결코 관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게 자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 사상의 방향을 약간 틀어서, 한편으로는 내세 중심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내면 중심으로 전환시켰습니다. 바울은 현재의 지배구도의 전폭적인 변화 대신에 무엇보다도 인고의 정신과 참회를 강조하였습니다.

 

3. 사도 바울의 입장 변화와 영지주의: 중요한 것은 바울에 의하면 현세가 아니라, 저세상이며, 외부 현실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정화시키는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원시 기독교의 사상 속에 도사린 거역의 정신은 사라지고, 참회와 극기로서의 믿음이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에게 고통을 가한 당사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고통을 감수하는 십자가에 박힌 채 세상의 죄를 스스로 끌어안는 예수의 태도가 더욱 중요한 것으로 수용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이래로 기독교의 복음을 따르던 자들은 바울의 입장을 거부하면서, 작은 종파를 구성하여 영지주의의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정통 기독교는 약 3백 년 동안 이러한 영지주의의 경향을 이단으로 매도해 왔습니다. 당시의 기독교 종파는 유럽 사회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등에서 완전히 확고한 토대를 다지지는 못했지만, 다양한 종파로 분화되어 나갔습니다. 영지주의 신앙은 먼 훗날 20세기에 이르러 나그함마디에서 파피루스에 기록된 문서가 발굴됨으로써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합니다.

 

4. 아우구스티누스의 삶 (1):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원후 354년 로마 제국의 힘이 쇠락하기 시작할 무렵에 북아프리카의 카타스테에서 태어났습니다. 타카스테는 그가 활동한 히포 레기우스Hippo Regius로부터 남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인데, 현재는 알제리에 속하는 땅입니다. 당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2세가 로마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의 시기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기독교 종파 가운데 아리우스파를 더욱 좋게 생각하고 있었고, 이로 인하여 교회 사람들은 처절할 정도로 교리에 관한 논박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세력이 약화되어 인접 국가의 침략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함을 드러내었으며, 아버지가 신봉하던 마니교에 침잠하기도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죽기 직전에 기독교로 개종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는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열정적이고 에너지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375년부터 그는 타가스테 지역의 변론술 교사가 되었습니다.

 

5. 아우구스티누스의 삶 (2): 아우구스티누스는 종교적 문제로 가족들과 마찰을 겪습니다. 어머니에게 마니교로 개종하라고 요구한 게 갈등의 발단이었습니다. 이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카르타고로 떠나 383년까지 그곳에서 변론술 교사로 일합니다. 385년에 그는 밀라노로 이사합니다. 바로 이 시기에 그의 관심사는 마니교를 벗어나, 플로티누스Plotin의 신플라톤주의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카르타고에서 데리고 온 여자 사이에서는 자식이 한 명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밀라노로 찾아와서, 아들의 결혼을 종용하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카르타고 여자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와 다시 동거 생활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놀라운 계시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몇몇 사람들은 어느 순간 놀라울 정도로 기막힌 계시의 경험을 겪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러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기독교에 개종하게 되었는가? 하는 내용은 그의 『고백록Confessiones』에서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6. 아우구스티누스의 삶 (3): 아우구스티누스는 386년에 밀라노에서 알리피우스와 함께 어느 친구의 집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혼자 정원을 거닐고 있다가, 지난날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뽕나무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이때 신이 나타나 “(성서를) 거머쥐고 읽어라Tolle lege”하고 외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Augustin 1990: VIII 12, 29). 그것은 다름 아니라 「로마서」 제 13장 13절의 말씀이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취하며,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 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하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마십시오.” 이 구절은 마치 사도 바울이 나타나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방탕하게 살아온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을 꾸짖는 것 같았습니다. 말씀은 조용하게 울려 퍼졌지만, 너무도 맹렬하게 아우구스티누스의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것 같았습니다. 이후로 그는 깊은 참회 끝에 기독교에 귀의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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