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Brecht

서로박: (11) 여인들의 브레히트. 사랑의 슬픔

필자 (匹子) 2024. 4. 11. 10:45

(앞에서 계속됩니다.)

 

11. 마르가레테 슈테핀 (1908 – 1941)

 

여자: 슈테핀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남자: 네, 마르가레테 슈테핀은 노동자들의 지역, 베를린의 쾨페니크에서 태어났습니다. 돈이 없어서 대학에 다닐 수 없었던 그미는 정치적 신념을 지녔을 뿐 아니라, 다섯 개의 외국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덴마크어, 스웨덴어)를 자력으로 마스터하였고, 두 개의 외국어 (핀란드어, 노르웨이어)의 기본 실력을 갖추게 됩니다.

 

여자: 뛰어난 두뇌를 갖춘 분인 것 같습니다.

남자: 18세의 나이에 슈테핀은 노동자 스포츠 단체에서 노동자, 딤케를 사귄 후에 동거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가난 때문에 미래를 약속할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딤케가 바람을 피우게 되었을 때 끝납니다.

여자: 슈테핀이 브레히트를 처음으로 만난 때는 1931년 가을이지요?. 그미는 베를린 발너 극장의 「어머니」 공연에서 하녀 역을 맡았으니까요. (GBA 11: 359).

 

남자: 네, 1932년 초에 브레히트는 영화 『쿨레 밤페, 혹은 세상은 누구의 것인가?』의 초연에 참석차 슈테핀과 함께 모스크바로 여행하였습니다.

여자: 그런데 그미는 폐결핵을 앓았지요?

남자: 1933년 4월에 슈테핀은 치료차 스위스에 체류했는데, 브레히트는 그미를 생각하면서 소네트 연작시를 집필하였습니다. 당시에 헬레네 바이겔은 슈테핀 때문에 이혼을 결심했으나, 정치적 망명으로 이를 성사시키지 못했습니다. (Kemp: 366). 1933년 9월 브레히트는 슈테핀이 머물던 프랑스의 사나리 쉬메르Sanary sur Mer를 방문했는데, 이때 함께 『서푼짜리 소설』을 집필했습니다. 슈테핀은 나치의 박해를 고려하면서,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1936년에 브레히트가 머물고 있는 덴마크의 스벤보르에 뒤늦게 합류하였습니다.

 

여자: 슈테핀은 루시 타우보바Lucie Taubova의 말씀에 의하면 브레히트와 “함께 사고하는 작가”였다고 합니다. (Reiber: 304). 슈테핀은 브레히트의 작품들을 일일이 수정하였습니다. 그미의 이름, “그레테”는 브레히트의 『작업일지Arbeitsjournal』에 도합 16번이나 언급되고 있습니다. (AJ: 14 – 277).

남자: 사실 브레히트는 부유한 제지공장주의 아들이었으므로, 독일 노동자들의 가련한 삶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슈테핀이 브레히트에게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교정 작업 시 슈테핀은 브레히트의 시민적 관점에서 나온 표현들을 수정하는 등 노동자의 시각에서 작품을 교정했습니다. (Ostmeier: 207). 슈테핀과 함께 일하고 사랑했던 10년은 브레히트에게 커다란 결실을 안겨준 나날이었습니다.

 

여자: 브레히트와 슈테핀은 정치적 아방가르드 운동을 함께 추진하면서, 공동의 이념과 사랑으로 서로를 도운 셈이로군요. (Reiber: 341). 브레히트와의 공동 작업은 말하자면 슈테핀의 자발적인 참여로 가능했습니다.

남자: 1941년 6월 4일에 슈테핀은 33세의 삶을 마감합니다. 슈테핀의 죽음으로 인하여 브레히트는 일시적으로 “멘붕 상태”에 빠졌습니다.

 

여자: 슈테핀은 스스로 게오르기아의 여왕, 츠비차 타마라Zwitza Tamara와 같은, 큰 그릇의 여인이 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Steffin 1999: 131).

남자: 좋은 지적이로군요. 슈테핀의 작품들은 1991년에야 비로소 세상에 공개되었는데, 극작품 2편, 단편 소설 12편 그리고 서정시 15편만 남아 있습니다. 대부분 제목이 없는 시편들은 한마디로 “간결한 정교함”을 드러내는데, 우리는 가난의 고통을 담은 삶, 브레히트에 대한 연정과 동지애, 사랑하는 임에 대한 헌신, 질투 그리고 슬픔 등을 접할 수 있습니다. (주경민: 2019: E북).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