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세계 문화

박설호: (3) 이종찬의 '훔볼트 세계사, 自然史 혁명'

필자 (匹子) 2024. 2. 4. 11:59

(앞에서 계속됩니다.)

 

다섯째로 자연사 연구가 예술의 영역과 상통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알렉산더 훔볼트의 자연사 탐구에는 사물의 근본을 발견하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하려는 초기 낭만주의의 예술적 의향이 담겨 있다. 이는 어디서 발견되는가?

 

훔볼트의 학문 영역과 그 체계는 오로지 자연과학자의 차원에서만 재조명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자연사의 영역 (기후학, 식물학, 동물학 광물학, 선사학, 민속학, 고고인류학, 고생물학, 역사 지질학)의 영역뿐 아니라, 사회과학, 특히 정치 경제학의 영역에서도 과히 혁명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종찬 교수는 특히 프랑스어로 집필된 훔볼트의 문헌이 지금까지 훔볼트 연구에서 소홀히 다루어졌음을 지적합니다. 이 가운데에는 탁월한 문헌, 『누에바에스타냐 왕국의 정치 에세이Essai politique sur le royaume de la Nouvelle-Espagne』 가 있습니다. 1811년 파리에서 발표된 이 문헌은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누에바에스파냐 왕국(멕시코)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보고하는데, 여기에는 식민주의 침탈과 야욕에 대한 훔볼트의 신랄한 비판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훔볼트는 평생 1200개의 많은 동판화를 제작했습니다. 이러한 기술은 젊은 시절에 함께 삼 개월 동안 유럽을 여행했던 그의 친구, 게오르크 포르스터Georg Forster의 도움으로 익힌 것이었습니다. 훔볼트의 동판화는 그 양식에 있어서 풍경화가,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e의 영향을 받았는데, 여기서 우리는 낭만주의 예술적 경향이 전수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훔볼트의 식물 지리학은 여기서 새로운 현실을 정밀하게 포착하기 위한 낭만주의 예술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습니다. 훔볼트는 특히 “픽처레스크”라는 회화 예술의 장르를 필연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왜냐면 그가 추구한 동판화 예술은 미(美) 그리고 숭고함을 추구하려는 예술적 기능 내지는 목표를 지닌 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연 본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는 의향 때문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열대 지역에 관한 동식물 그리고 지질학 연구는 이종찬 교수에 의하면 서구 낭만주의 예술을 자극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낭만주의 연구에서 중요하게 거론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사실 영국 낭만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은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뮈스 다윈의 시집 『식물원The botanic garden』 (1791)이었습니다. 작품들은 기이한 이국적인 식물 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데,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와 콜리지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종찬: 열대의 서구, 朝鮮의 열대,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6, 418쪽.). 당시 영국의 자연사 학자, 손턴의 『식물의 신전The Temple of Flora』 (1807)에 나오는 꽃의 그림들은 노발리스에 의해서 지상에 없는, 어쩌면 열대 지역에 자랄지 모르는, 하나의 신비로운 “푸른 꽃die blaue Blume”으로 투영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노발리스Novalis는 게오르크 필립 폰 하르덴베르크의 필명으로 알려졌는데, 어원상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노발리스가 짧은 생애동안에 광물학을 연구했다는 사실은 낭만주의자들의 열대 지역에 대한 관심사를 그대로 반증하고 있습니다.

 

놀라게 하는 사항은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첫째로 책은 훔볼트 연구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훔볼트의 저작물은 훔볼트의 단독으로 완성한 것들이 아니라, 그의 동반자, 에메 봉플랑 그리고 열대 지역의 혼혈인 연구자들과의 소통과 협력 작업을 통해서 완성된 것입니다. 학문의 학제적 연구는 독자적인 각개전투의 방식으로 수행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지금까지 동서양의 훔볼트 연구는 1801년부터 1822년 훔볼트가 파리에서 완성한 프랑스어 문헌을 좌시하고, 그저 1845년에서 1862년 사이에 집필한 저작물 『코스모스』만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년의 문헌, 『코스모스』는 광활한 세계의 연구를 포괄하지만, 근본적으로 훔볼트 자연사 연구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22년 동안 파리에서 수행한 연구 결과물을 생략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훔볼트 문헌의 가치는 독어독문학의 영역을 넘어서 폭넓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셋째로 이와 관련하여 한국의 인문학자들의 학술 논문의 치명적인 결함은 이종찬 교수에 의하면 열대 탐험 그리고 자연사 연구에 관한 구체적 이해 없이 오로지 문헌 자체만을 중시하는 데에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는 안타깝게도 조선 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학문 연구의 관행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문헌학적 연구 역시 차제에는 사회과학과 자연과의 실험과 협력하여 추진되어야 할 것입니다.

 

넷째로 한국의 폐쇄적 학문 풍토는 이종찬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실리 대신에 명분만을 강조하는 조선 시대의 성리학의 폐습에 기인합니다. 예컨대 정약전은 홍어 장수, 문순득(文淳得)의 3년 동안의 항해를 전해 들었을 때 모든 것을 피상적으로 이해했을 뿐 타국에 관한 그의 생생한 체험이 세계의 문화와 문물 교류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실학은 오로지 청나라 문물에 의존한 데 비해, 일본 사무라이들은 서양의 문물을 난학(蘭学)으로 발전시켜서 근대화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노동을 천시하고, 기술을 배척하는 성리학자 사대부의 허례허식 그리고 새로운 무엇을 일차적으로 배척하려고 하는 보수적 성향에 기인합니다.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