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세계 문화

박설호: (2) 이종찬의 '훔볼트 세계사, 自然史 혁명'

필자 (匹子) 2024. 2. 4. 11:58

(앞에서 계속됩니다.)

 

셋째로 열대 지역의 토속적이고 원시적인 문화 속에도 서구 문명이 채택할 수 있는 어떤 새롭고 유효한 자양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이와 관련하여 콩고 아이티 혁명은 프랑스 혁명을 촉발하는 근본적인 의향으로 이해되는 근거는 무엇인가?

 

콩고 아이티 혁명은 프랑스 혁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1700년경에 아메리카 정복자들은 아프리카의 콩고 지역에서 약 50만 명의 흑인을 산토도밍고로 이전시켰습니다. 그들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거대한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16세기에 에스파냐의 신부, 라스카사스는 힘없는 인디언들보다 차라리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데리고 와서 노동력을 보충하면 어떨까? 하고 카를 5세에게 요청한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은 나중에 “씨”가 되고 맙니다. 라스 카사스는 흑인의 인권은 인디언의 인권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요청을 뼈저리게 후회했습니다. 어쨌든 1700년경에 50만의 흑인들은 산토도밍고에 도착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6만 2천 명이 콩고 왕국의 백성이었습니다. 콩고 출신의 흑인들은 고결한 마음을 지니고, 대부분 고향에서 평화롭게 살던 자연인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서인도 제도의 에스파냐 사람들이 아프리카에서 갈레 선을 타고 이주한 흑인들을 그야말로 노예처럼 혹독하게 부려먹었다는 사실입니다.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은 하루 14시간 일하면서 비참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콩고 왕국에서 태어난 “막칸달Mackandal”은 산토도밍고에 도착하는 순간 열대 지역의 섭리가 파괴되는 것을 직감합니다. 그는 흑인들을 규합하여 플랜테이션 구역을 탈출합니다. 나중에 흑인들은 그들 고유한 신앙인 “보두 종교”의 영성의 힘을 바탕으로 식민 통치자에 맞서 싸웁니다. 이로써 생겨난 것이 이른바 콩고 아이티 폭동입니다. 콩고 아이티 항쟁은 하루아침에 발발하여 순식간에 끝날 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에스파냐 출신의 백인 농장주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흑인 노동자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입니다.

 

흑인들의 항쟁은 1750년부터 약 40여 년 동안 연속적으로 이어집니다. 가장 격렬한 무장 투쟁은 1792년에 발발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지 3년 후의 시점이었습니다. 흑인들의 무장 투쟁에 관한 소식은 그 이전에도 프랑스 전역에 수없이 퍼져나갔습니다. 신대륙에서의 흑인 폭동에 관한 이야기는 메르시에의 유토피아 소설 유토피아 소설 『서기 2440년을 꿈꾸며L'An 2440, rêve s'il en fut jamais』 (1771)에도 묘사될 정도입니다. 훔볼트 역시 1799년 7월에 쿠마나에 도착했을 때, 흑인들의 무장 투쟁에 관한 소식을 이미 숙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그는 자신의 탐험이 몹시 위험할 것이라고 직감했습니다. 게다가 신대륙에는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해 정치적 분위기는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이 모든 것은 훔볼트의 일기에 고스란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훔볼트는 흑백 간의 분쟁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 “흑백 혼혈 인종인 물라토Mulatto”가 백인과 혼인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혼혈 인간이 탄생하는 게 궁극적으로 인종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는 인종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 가운데 하나인데, 드니 디드로 역시 『부갱빌 여행기 보유』에서 거론한 바 있습니다. 디드로는 이 책에서 백인의 영리한 두뇌와 염소의 다리를 지닌 (육체적으로 강인한) 혼혈인 “크레올”을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인간형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인의 두뇌를 무조건 우수하다고 단언한 데에서 디드로의 백인 우월주의가 엿보입니다.

 

문제는 콩고 아이티 항쟁이 프랑스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입니다. 혹자는 1792년에 발발한 콩고 아이티 무장 폭동만 염두에 두고 프랑스 혁명이 연대기적으로 앞선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콩고 아이티 혁명이 1750년부터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우선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구호는 주지하다시피 -프랑스 삼색기에 그려진 그대로- 자유, 평등 그리고 동지애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자유, 평등 그리고 동지애는 오로지 프랑스인들에 의해서 독창적으로 창조된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1) “자유liberté”는 구속과 부자유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아프리카 콩고인들이 믿었던 “보두교의 우주론”이라는 핵심 원리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 해방의 공동체 “마룬”을 설립했습니다. (185쪽) 마룬 (maroon)은 에스파냐어로 “야생”을 뜻하는데, 이것은 아프리카의 시마론(Cimarron)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마룬 공동체는 춤의 의식을 통해서 공동적으로 커다란 자아를 추구하는 예식을 올리는데, 에스파냐 정복자들은 이러한 예식을 철저히 금지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콩고인들의 고결한 자유에 관한 내용은 심지어는 『직방외기(職方外紀)』 (1623)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알레니 신부가 중국에 머물 때 중국어로 집필한 책인데, 정두원(鄭斗源)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1631년에 조선으로 가지고 온 문헌입니다.)

 

(2) “평등égalité”은 식물계, 동물계 그리고 광물계의 모든 개체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형성된 특징입니다. 한 개체가 다른 개체를 억압하거나 두 개체 사이에서 유기적인 관계가 무너지면, 생태적 균형이 깨어집니다. 마룬 공동체가 생각하는 평등이란 너와 나의 평등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인간과 주위 환경 사이의 수직적 관계를 넘어서려는 사고 내지는 의식을 가리킵니다. 자연의 이러한 평등한 위계 질서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생각하는 “어머니로서의 땅”의 개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3) “동지애fraternité”도 평등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콩고 흑인들은 고향 아프리카에서 다른 종족과의 우애 관계가 무엇보다도 전쟁을 차단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평화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습니다. 동지애는 더 큰 자아로서의 대아라는 개념과 연결됩니다. 서양 사상에는 대아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아는 동양 사상 내지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서 엿보이는 “나를 포함한 나”의 개념을 가리키지요. 진정한 자아는 마치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자식을 동일시하듯이, “우리 함께 서로를 위하는 자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동지애”는 같은 부족의 단합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다른 부족과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요약하건대 프랑스 혁명 운동은 콩고 아이티 항쟁 없이는 도저히 생각될 수 없습니다. 콩고 아이티 혁명 운동은 19세기 유럽에서 전개되었던 모든 개혁과 혁명적 사고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지금까지의 서양사에서 활발하게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유럽 중심적 사고가 이를 차단했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어떠한 까닭에 야생의 삶이 원시적이고 야만적이 아닌가? 문명과 야생, 다시 말해서 서구와 열대 지역은 지질학 그리고 민속학의 측면에서 제각기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은 과연 학문적 교류와 민속 문화의 소통을 통해서 상호 보완될 수 있는가?

일단 우리는 아프리카 콩고인들이 숭상하는 보두 종교를 다시금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두 신앙은 해방과 치유를 위한 영성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쿨뢰브르Couleuvre”라는 이름의 뱀을 숭배합니다. 우주와 함께 태어난 쿨뢰브르는 과거에 대한 지식, 현재에 대한 통찰 그리고 미래에 대한 예지력을 한꺼번에 지니고 있습니다. 숲에서 서식하는 모든 식물은 뱀의 에너지에 의해서 자라난 약용식물들입니다. 놀라운 것은 약용식물의 기원에 관한 신화가 우주 창조의 신화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아프리카의 보두 신앙에는 식물적 우주에 의한 치유와 갱생이 종교적 차원에서 전승되고 있습니다. 보두 종교의 사제들은 예컨대 약초 치료사, 약제 조무사, 조산원, 심리 치료사 등으로 주위 사람들을 도와줍니다. 이로써 우주 속의 자연과 인간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주술적인 힘으로 분출되고 있습니다. 식물의 숭배는 애니미즘의 사고로 이해되지만, 오늘날에도 활용 가능한, 도덕적으로 귀중한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로 신대륙과 유럽 사이에 동식물만 교류된 게 아니라, 수많은 질병 역시 동서양 사이에서 유통되었습니다. 자고로 인구의 이동은 의학적 차원에서 질병을 유발하며, 동시에 이에 대한 치료를 연구하게 합니다. 16세기 중엽부터 서구의 모든 미생물은 서인도 제도에 그대로 이전되었고 신대륙의 질병 역시 유럽으로 건너왔습니다. 수많은 원주민은 처음에는 에스파냐 정복자들의 살육을 통해서, 나중에는 서구의 여러 가지 병균에 의해서 무차별적으로 죽어 나갔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혈액형의 95%는 RH 플러스 O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순혈주의의 체질이 아메리카 대륙의 지리학적 풍토에서 자생적으로 계승되었음을 반증합니다. 그렇기에 유럽에서 해롭지 않은 병균은 원주민들의 체내에서는 치명적 질병으로 작용했습니다. 19세기 초 산토도밍고에서 “황열”이라는 전염병이 창궐하게 된 것은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1560년경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90%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황열은 50만 명의 인구 이동 그리고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거대 농장은 황열이라는 질병을 창궐하게 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치명적으로 해악을 끼친 황열은 특수한 환경에서 인위적으로 출현한 인재(人災)와 같습니다. 다시 말해 황열이 창궐하게 된 것은 생태 환경이 유기적 균형이 붕괴하여 나타난 현상이었던 것입니다.

 

요약하건대 모든 문물은 문명에서 야만으로 전해지는 일방통행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전후좌우 그리고 상하에 상관없이 사통팔달로 이전되고 교류됩니다. 흔히 서구인들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원시적인 종교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이라고 단언하는데, 이는 자연사의 관점에서는 편견에 근거한 일방적인 선입견에 불과합니다. 문명과 야생은 인류 집단이라는 동일한 동전의 양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