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세계 문화

박설호: (1) 이종찬의 '훔볼트 세계사, 自然史 혁명'

필자 (匹子) 2024. 2. 4. 11:56

이종찬 교수의 저서, 『훔볼트 세계사 自然史 혁명』 (2020)은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생애에 관한 전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대륙을 탐험하는 여행기도 아닙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열대 탐험을 통해서 쌓아가는 새로운 진리의 섭렵 과정을 밝히고 있는데, 이로써 독자는 발견되는 지식이 얼마나 혁명적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발견되는 지식”이란 야생이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에게 얼마나 귀중한 의학적 자연과학적 예술적 자양을 제공하는가? 라는 물음과 관련됩니다. (이종찬: 파리 식물원에서 데지마 박물관까지, 해나무 2009, 34쪽.) 실제로 자연사 연구는 자연 과학 전반에 걸친 지식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하는 과업입니다. 식물학, 동물학, 광물학은 물론이고, 낯선 지역의 기후와 지질을 알아야 하며, 고고인류학과 민속학 고생물학 분야까지 모조리 탐색해야 가능한 학제적 연구 분야입니다.

 

미리 말씀드리건대 『훔볼트 세계사 自然史 혁명』 은 지금까지 자연 과학의 문헌들이 충족시키지 못한 놀랍고도 독창적인 특징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특징은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종찬 교수의 책은 어떠한 점에서 자연 과학의 폐쇄적인 틀을 박차는가? 자연사 연구가 생물학, 지리학 그리고 의학 등의 다양한 시각을 요청하며. 인문 사회과학의 맥락과 연결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둘째로 『훔볼트 세계사 自然史 혁명』 은 어떠한 맥락에서 서양의 일방적 관점에서 벗어나 열대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가?. 이로써 오리엔탈리즘의 사고는 사회사적으로 그리고 민속학과 자연 과학의 측면에서 얼마나 일방적이고 편협한가?

셋째로 열대 지역의 토속적이고 원시적인 문화 속에도 서구 문명이 채택할 수 있는 어떤 새롭고 유효한 자양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이와 관련하여 콩고 아이티 혁명은 프랑스 혁명을 촉발하는 근본적인 의향으로 이해되는 근거는 무엇인가?

넷째로 어떠한 까닭에 야생의 삶이 원시적이고 야만적이 아닌가? 문명과 야생, 다시 말해서 서구와 열대 지역은 지질학 그리고 민속학의 측면에서 제각기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은 과연 학문적 교류와 민속 문화의 소통을 통해서 상호 보완될 수 있는가?

다섯째로 자연사 연구가 예술의 영역과 상통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알렉산더 훔볼트의 자연사 탐구에는 사물의 근본을 발견하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하려는 초기 낭만주의의 예술적 의향이 담겨 있다. 이는 어디서 발견되는가?

 

첫째로 이종찬 교수의 책은 어떠한 점에서 자연 과학의 폐쇄적인 틀을 박차는가? 자연사 연구가 생물학, 지리학 그리고 의학 등의 다양한 시각을 요청하며. 인문 사회과학의 맥락과 연결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흔히 사람들은 훔볼트는 여행자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1769 – 1859)는 연대 지역의 “새로운 무엇Novum”을 하나씩 체계적으로 섭렵해나갔습니다. 그는 1799년 6월 5일에 에스파냐에서 자신의 친구이자 평생의 동료, 에메 봉플랑Aimé Bonpland과 함께 중남미 지역으로 떠납니다. 그들의 일감은 지도를 작성하고, 광물과 동식물을 연구하며 원주민의 삶과 풍습을 탐구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자고로 새롭게 접하는 사물은 직접 보고 익히는 게 참다운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훔볼트는 바로 이러한 지식을 습득해나갔던 것입니다. 여행을 마친 그들은 워싱턴에서 토머스 제퍼슨을 만난 다음에 1804년 8월에 프랑스의 보르도로 돌아옵니다. 당시에 훔볼트는 제퍼슨에게 파나마 건설의 필요성을 강하게 설파했습니다. 말하자면 파나마 운하가 착공되기 100년 전에 훔볼트는 파나마 운하의 건설을 제안했던 것입니다. 훔볼트의 탐험은 거의 5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처음에 훔볼트는 베를린에 잠시 머물다가 파리로 돌아가서 약 22년 동안 그곳에서 저술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상기한 사항을 고려할 때 훔볼트가 단순히 여행자로 이해될 수는 없습니다. 스위스 작가, 알랭 드 보통Allain de Botton은 자신의 책 『여행의 기술L'art du voyage』에서 훔볼트를 단순히 “여행자”로 칭했는데, 이는 오류입니다. 여행과 탐험은 일견 유사한 것 같으나, 목표 지향성을 고려할 때 서로 다릅니다. 열대 우림 지역에 관한 훔볼트의 탐험은 새로운 진리를 구체적으로 찾아내려는 필연적 사투였습니다. 열대 지역은 콩고를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 중부 지역 그리고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지역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훔볼트는 이 가운데 중남미를 선택하여 그 지역의 학문적 사회적 그리고 예술적 비밀을 탐험해나갔습니다. 그는 봉플랑과 함께 광업과 광물학, 지질학, 생리학과 화학, 식물 지리학 등에서 새로운 진리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나아가 탐험의 과정에서 식민지 쟁탈을 통한 정치 경제적 착취 행위 내지는 사회적 문제 또한 탐험기에 모조리 기술했습니다.

 

이를 고려할 때 훔볼트는 여러 학문 영역을 폐쇄적으로 고찰하는 “고체형의 학문 연구자”가 아닙니다. 그는 자연사라는 학제적 연구를 통해서 실험과 탐험 그리고 공동의 협력 작업을 강조하였고 지도를 제작하면서 온갖 측정 도구 또한 활용했습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훔볼트는 역동적으로 활약한 “유체형”의 제네랄리스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종찬 훔볼트 세계사, 자연사 혁명, 지식과 감정 2020: 87).

 

둘째로 『훔볼트 세계사 自然史 혁명』 은 어떠한 맥락에서 서양의 일방적 관점에서 벗어나 열대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가?. 이로써 오리엔탈리즘의 사고는 사회사적으로 그리고 민속학과 자연 과학의 측면에서 얼마나 일방적이고 편협한가?

흔히 제삼세계의 야만을 바로잡은 것은 서구의 문명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식민주의의 사관은 그 자체 일방적 편견입니다. 서구 문명은 열대 지역의 원시적 문화 속에 담긴 여러 가지 자양 내지는 도움 없이는 더욱 발전할 수 있습니다. 야생에 대한 비판은 흑인에 대한 경멸감과 관련됩니다. 헤겔은 흑인들이 야만적이고 난폭하다고 기술하였습니다. (Hegel: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 Frankfurt a. M. 1970, S. 122.) 훔볼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노골적으로 헤겔을 비판하지는 않았습니다.

 

열대 우림의 탐색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실제로 훔볼트와 봉플랑은 모래벼룩, 구더기 코야, 에커러 등의 작은 동물에 시달렸고, 비에 젖은 옷은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물 아래에는 피라니아가, 물가에는 악어가, 공중에는 모기 구름이, 육지에는 독사들과 재규어들이 있었습니다. 먹을 게 없어서 원숭이 고기와 개미 그리고 악어 기름으로 배를 채우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강물에서 활동하는 전기 뱀장어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신대륙의 탐색은 처음부터 엄청난 모험과 난관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탐험을 위해서 옷과 텐트는 물론, 많은 측정 도구를 챙겨야 했습니다. 1. 나침판, 2. 망원경, 3. (선박의 경도를 측정하는) “시진의Chronometer”, 4. (선박의 위도를 측정할 수 있는 사분의 그리고 육분의, 5. 천체의 위치를 파악하는 경위의, 6. 복각계(伏角計), 7. 자기계 등이었습니다.

 

훔볼트의 연구 결과물은 지리학, 의학 그리고 예술 분야를 총괄한다는 점에서 “자연사의 혁명”과 같습니다. 그는 서구의 문명이 열대의 광물과 동식물 연구를 통해서 자연 과학의 어떤 결함을 보완하려고 했습니다. 열대 지역의 주민들 또한 서구 문명의 장점을 수용하여 삶의 질을 향상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한마디로 훔볼트는 “3M”으로 요약되는 유럽 중심주의의 의향 (군대military, 기독교 전파mission, 무역merchant)을 위해 제삼세계에 접근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훔볼트의 자연사 탐색은 아메리카 정복자, 상인 그리고 기독교 수사의 활동 방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습니다. 요약하건대 훔볼트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식민 사관을 지니지 않은 자연과학자였습니다. 그는 서구와 열대, 문명과 야생 사이에 도사리고 있는 학문적 차원에서의 불충분한 면을 발견하고 상호 교류와 협력 작업을 통해서 두 개의 서로 다른 현실의 제각기 발전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2, 3에서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