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5) 디드로의 '부갱빌 여행기 보유'

필자 (匹子) 2023. 9. 28. 10:48

(앞에서 계속됩니다.)

 

25. 염소의 발을 지닌 인간: 디드로는 두 개의 잣대로서의 이중적 코드를 지닌 인간을 “염소의 발을 지닌 인간”으로 비유했습니다. 물론 인간이 염소의 발을 지녔다면, 이는 실제 현실에서는 괴물로 인지되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염소의 발을 지닌 인간”은 우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문명사회의 삶 그리고 타히티와 같은 곳에서의 자연친화적인 삶을 동시에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염소의 발을 지닌 인간”으로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염소는 힘이 세고, 놀라운 지구력을 드러내며, 민첩합니다. 이러한 육체적 기능에 인간의 총명한 두뇌가 첨가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다 핵심적인 문제는 제 1세계와 제 3세계 사이의 갈등과 착취구조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디드로는 자본주의의 이윤추구 및 식민지 쟁탈의 시대 이전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제 3세계의 착취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점을 직시하지 못하고, 두 개의 문화를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인간형을 막연하게 떠올렸던 것입니다. 만약 “염소의 발을 지닌 인간”이 20세기에 활동한다면, 그는 아마도 식민지에서 혹사당하는 노예의 신세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억압과 경제적 착취 구조를 무시한, 성과 인종 그리고 사랑에 관한 추상적 논의는 그야말로 사치스러운 게 아닐 수 없습니다.

 

26. 디드로 문헌의 독자적 가치: 디드로의 『부갱빌 여행기 부록』은 플라톤과 모어 이후의 유토피아주의자들이 시도한 더 나은 사회의 새로운 시스템을 설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디드로는 다음의 사항을 분명하게 지적하였습니다. 즉 인간의 새로운 삶의 가능성은 하나의 구도 속에 차단되는 게 아니라, 개방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디드로의 유토피아는 하나의 새로운 사고로서 독자들에게 어떤 깨달음의 계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 그리고 문명이 이원론적 대립을 지양하고, 상호 공존하고,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상대방에 의해서 보완할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문명인이라고 해서 모조리 찬란한 삶을 영위하고, 미개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천박한 삶을 이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한마디로 디드로의 책은 자연 친화적인 삶과 유럽 문명 속의 삶이 서로 우월을 가릴 수 없으며, 그 자체 제각기 다른 사회적 코드에 의해서 영위된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또 한 가지 사항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제국주의의 잔인한 착취와 사디즘의 폭력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이는 부갱빌 여행기 부록의 두 번째 단락, “노인의 작별 인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유럽 문명이 제 3제국에게 전해주는 문명은 모조리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디드로의 부갱빌 여행기 부록은 라스카사스 이후에 나타난,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비판의 서적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27. 사회 계약 이론의 선구자: 또 한 가지 첨가할 사항이 있습니다. 디드로는 루소의 사회 계약에 관한 이론이 나타나기 이전에 자신의 고유한 자연법적 사고를 제기하였습니다.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권한을 지니지 않았다는 사고 말입니다. 권력자가 정치적 권위를 지닐 수 있는 유일한 까닭은 그들이 사회 계약에 의해서 일반 시민들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디드로는 18세기 절대주의 왕정의 모든 체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던 카타리나 여왕을 만났을 때에도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마치 존 로크 학파의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의회의 결정을 무엇보다도 존중하는 군주제에 동의하였습니다.

 

모든 정책은 왕 한 사람의 결정에 바탕을 둘 게 아니라, 무엇보다도 시민주체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선출된 의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집행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디드로는 민주주의의 정책과 그 장점을 인지하고 동의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대에서 살다가 갔습니다. 그는 앙시앵레짐이 횡행하는 시대에 백과사전 학파의 한 사람으로서 계몽이라는 무기만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약하건대 『부갱빌 여행기 부록』을 통하여 디드로는 이상적인 사회 계약의 사고를 역사철학적 진보의 모델의 틀과 일치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나름대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루소의 제자 메르시에는 이와 유사한 시도를 행하였습니다. 디드로가 지구 반대편의 타히티 섬을 바탕으로 자연의 삶의 이상을 설계하였다면, 메르시에는 『서기 2440년』에서 이상이 실천될 수 있는 시점을 미래로 설정하였습니다. 정태적 유토피아를 능동적 유토피아로 바꾸고, 유토피아의 장소를 미래의 시간으로 이전한 것은 분명히 메르시에의 공로입니다. 그렇지만 이를 위한 가교를 놓은 사람은 다름 아니라 드니 디드로였습니다.

 

참고 문헌

골드만, 뤼시앙: 계몽주의 철학, 문사연 역 청하 1983.

디드로, 드니: 달랑베르의 꿈, 김계영 역, 한길사 2006.

디드로, 드니: 부갱빌 여행기 보유, 정상현 역, 숲 2003.

Berneri, Marie Louise: Reise durch Utopia, Berlin 1982.

Diderot, Denis: Nachtrag zu Bougainvilles Reise, München 1981.

Fanon, Frantz: (독어판) Die Verdammten dieser Erde, Suhrkamp, Frankfurt 2001.

Jens, Walter (hrsg.): Kindlers Literaturlexikon, München 2001.

Oellers, Norbert (Hrsg.): Gedichte von Friedrich Schiller. Interpretationen. Reclam, Stuttgart 1996.

Saage, Richard: Utopische Profile, Bd. 2, Aufklärung und Absolutismus, Münster 2002.

Schiller, Friedrich: Sämtliche Gedichte und Balladen, München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