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4) 디드로의 '부갱빌 여행기 보유'

필자 (匹子) 2023. 9. 27. 18:38

(앞에서 계속됩니다.)

 

11. 작품의 틀과 내용: 일단 작품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장은 작품의 틀로 작용하는데, A와 B 사이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B는 작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화자입니다. A와 B는 부갱빌 여행을 재론하면서, 여행의 체험에서 필연적 결론을 도출해냅니다. 두 번째 단락은 타히티 노인이 프랑스 선원들과 작별할 시기에 남긴 연설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노인은 프랑스의 비양심적이고 파렴치한 제국주의 정책을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타히티 사람들은 오로지 선의에 의해서 유럽의 손님들을 성심껏 대접했으나,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의 호의를 악용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평화롭던 섬은 유럽 선원들을 통해서 낯선 문명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토착의 종교와 도덕은 완전히 허물어지게 되었으며, 매독 등과 같은 성병이 창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타히티 사람들을 끔찍한 불행 속으로 몰아갔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 우리는 20세기 중엽부터 고개를 든 신-식민주의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드러낸 바 있는 프란츠 파농 Frantz Fanon의 『대지에서 저주받은 자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파농은 피를 토하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신식민지의 비참한 상황에 처한 알제리 사람들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장은 프랑스 사제와 타히티 부족장, 오루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루는 타히티에서 살고 있는 폴리네시아 사람들의 가정제도 그리고 사랑의 관습을 설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딸을 프랑스 사제에게 바치면서 동침을 권합니다. 프랑스 사제는 종교적 계율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다가, 하룻밤에 한 명씩 살을 섞게 됩니다. 프랑스 사제가 불과 이틀 동안에 느낀 짜릿함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황홀감,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12. 자연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 강제적 폭력이 없는 나라: 디드로의 부갱빌 여행기 부록에서 타히티의 정치 조직을 세밀하게 파악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타히티 사람들이 자연의 법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에 따라 사회적 조화로움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연의 순수한 충동에 순응하면서 살아갑니다. 디드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그대가 마치 가축처럼 소유하려고 하는 자는 그대의 형제자매이다.” 부갱빌이 섬을 떠나려고 할 때 노인은 마지막 작별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는 자연의 아들들이다.” (Diderot: 205). 

 

이를 고려할 때 자유와 평등은 원초적으로 주어져 있으며, 타히티 사람들은 특정한 종교적 도덕적 법칙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미개하다고 간주되는 타히티 사람들은 자연법칙을 준수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말해서 어떤 문명화된 민족보다도 더 선한 법칙을 준수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타히티에서는 전쟁의 상태를 제외하고는 국가의 강제적 폭력이 자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국가의 폭력을 배제한 아나키즘에 대한 디드로의 긍정적 입장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13. 타히티의 경제와 노동: 타히티는 온화한 기후의 영향으로 많은 과일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곳 사람들은 굶주림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 그리고 좋은 것은 모두 소유하고 있다. 분에 넘칠 정도로 풍요로운 욕망을 추구하며 이를 실현시키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경멸스러운 민족일까? 배고프면 우리에게 먹을 것이 주어진다. 추우면, 우리는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옷과 이불들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Diderot: 205). 

 

나아가 타이티에서 최고의 미덕으로 간주되는 것은 건강 외에도 부지런함, 아름다움, 체력 그리고 용기 등입니다. 그런데 부지런함의 덕목은 원주민들의 생존에 필수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자연적으로 자라나는 과일들이 충분히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지런히 노력하여 분에 넘치는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부지런하게 움직여서 개별 사람들은 힘을 비축할 수 있는데, 이는 인구 증가에 크게 공헌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지런함은 부의 축재를 위한 게 아니라, 건강과 연결되는 덕목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14. 성의 문제:놀라운 것은 타히티의 대부분의 여성들이 자유로운 사랑의 삶을 자청해서 즐긴다는 사실입니다. 타히티의 자유분방한 삶과 그들의 본능적 욕구를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독일의 작가, 프리드리히 실러 Friedrich Schiller는 자신의 시 「종 Die Glocke」에서 “고삐를 푼, 제어할 수 없는 여성은 가장 끔찍하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실러의 이러한 견해는 유럽 시민 사회의 관습을 그대로 대변하는 말입니다. 실제로 유럽의 근대 사회에서는 남성은 문화적인 존재로, 여성은 본능적 존재로 이해되었습니다.

 

여성의 본능은 자연의 힘 내지 생물학적 모태로서 거대한 욕정으로 표현되지만, 시민 사회에서는 오로지 가정이라는 굴레 속에서 해소되어야 하는 무엇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자신의 남편이 다른 곳에서 성욕을 채울 경우, 아내는 모든 것을 참고 견뎌야 했습니다. 시민 사회에서 이혼한 여자, 남편을 사별한 여자 등이 새로운 남편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반해서 타히티의 여성들은 성행위의 주체자로서 사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얼마든지 쾌락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부갱빌의 여행기는 바로 이러한 여성의 본능을 조금도 꾸밈없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15. 성에 대한 디드로의 입장: 독실한 기독교인인 작가, 디드로는 타히티의 성윤리를 무작정 예찬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디드로가 여성 해방론자라는 주장은 그 자체 설득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디드로는 여성의 동등권에 관해서 깊이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눈앞에는 다른 중요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타히티의 성윤리와 관련하여 우리는 디드로가 두 개의 서로 다른 사회적 관습, 도덕 그리고 법을 개별적으로 인정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럽 사회와 타이티 사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로 다르지만, 제각기 고유한 문화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타히티는 이미 언급했듯이 관능과 쾌락이 넘치는 “새로운 시테라 Cytherea nouveau”이며, 기후적으로 병자가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에 적격인 따뜻하고 온화한 장소입니다. 많은 열대 과일들은 그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지 않고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부갱빌 선원들은 도착하자마자 이곳 사람들에 의해 극진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원주민들에게는 증오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소유관계가 불분명하고 도둑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어느 집이든 간에 대문이 잠겨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연의 만물을 공동으로 나누어가집니다.

 

16. 타히티의 독특한 성 문화: 장점이라고 표현하면 어폐가 있지만, 타히티에서는 혼음의 풍습이 존재합니다. 원주민은 이곳을 찾는 손님이 하룻밤을 보내도록 자신의 아내를 빌려줍니다. 아니,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뜻에 따라 손님과 하룻밤을 즐기려고 한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각자의 쾌락이 그야말로 국민적 축제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부다처제 내지 다부일처제가 보편화되어 있는 셈이지요. 여성들은 결혼하게 되면, 남편에게 복종하지만, 외간 남자와 외도할 의향이 있으면, 남편에게 미리 언질을 던집니다. 이때 남편은 특별한 사유가 없을 경우, 이를 대체로 허락합니다. 이때 부부 사이에는 어떠한 질투심도 자리하지 않습니다. 남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여성들이 마음이 가는대로 성적 본능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해도 사회는 이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17. 인구의 증가를 추구하는 타히티의 여성 공동체: 상기한 이유로 인하여 우리는 타히티의 여성 공동체가 플라톤과 캄파넬라의 여성공동체에 비해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플라톤과 캄파넬라는 성을 위생학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종족번식의 수단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타히티의 여성 공동체의 경우와 거의 동일합니다. 그렇지만 플라톤과 캄파넬라는 인구의 무조건적인 증가가 공동체의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타히티 사람들은 인구가 무조건적으로 증가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타히티 공동체는 남녀의 에로틱한 성관계를 최대한 권장하고 있습니다. 출산의 능력이 있는 여성들은 외부인과의 정사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출산 능력이 없는 자라든가 미성년의 경우 성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과 관련된 모든 사항들은 출산을 권장하기 위한 조처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타히티 공동체는 결혼시 여성의 지참금 문제 그리고 이혼시 자녀 양육에 관한 권한 등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18. 타히티 사회의 부정적 특징들: 타히티 사회는 성에 있어서는 관대하지만, 다른 몇 가지 사항에 있어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면이 온존합니다. 첫째로 야만의 사회가 그러하듯이, 그들은 이따금 인접 섬의 사람들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릅니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온 남자와 사내아이들은 언제나 살육의 대상입니다. 타히티 사람들은 포로들을 죽여서 수염과 턱의 가죽을 벗겨내어 전리품으로 삼습니다. 이는 타히티가 미개 사회라는 것을 분명히 시사해주는 대목입니다. 둘째로 타히티 사람들은 해와 달 그리고 천체의 항성들을 신으로 숭배하는데, 그들을 위해서 살아있는 인간을 희생물로 바칩니다. 이로써 무고한 인간의 목숨은 신의 제물로 활용됩니다.

 

셋째로 타히티는 철저한 계층사회로서 사람들 사이에 계급 차이가 존재합니다. 이를테면 제 1계급이 왕족이고, 제 2계급은 부자들입니다. 제 2계급 사람들은 귀족으로서 아랫사람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면서 그들을 관할합니다. 사유재산제도는 없지만, 노예 및 하부 계급 사람들을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은 존재합니다. 제 3계급은 일반 사람들이고, 제 4계급은 포로 내지 노예들입니다. 사람들의 계층은 세습된다는 점에서 원시 고대 사회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부갱빌은 여행기를 집필할 당시에 타히티 문화의 장단점을 면밀하게 파악하며, 이를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