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1) 생시몽의 중앙 집권의 유토피아

필자 (匹子) 2024. 1. 27. 11:06

1. 생시몽의 폭넓은 사상적 스펙트럼: 생시몽 (Claude-Henri de Saint-Simon, 1760 - 1825)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협동을 강조함으로써 거대한 국가의 전체적 부를 창조할 수 있는 생산력 증강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사고는 사회 전체 그리고 거대한 국가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와 자본가의 개별적 이익에 일방적인 힘을 실어주지는 못했습니다. 생시몽의 사상은 지엽적이고 작은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의 번영과 이득을 도모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넓은 시야, 사회 전체의 이득과 평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어떤 강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생시몽은 귀족의 신분 때문인지는 몰라도 19세기 중엽에 나타난 초기 자본주의의 폐해 내지는 사회 계층적 갈등 등을 예리하게 투시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생시몽주의는 과학주의 내지 “사회 공학social engineering”과의 관련성에서 이해된 바 있는데, 이는 어쩌면 방향착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시몽의 전체성은 전체주의와 직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갑수: 29). 바로 이 점이야 말로 어째서 생시몽의 사상이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 등에게 폭넓게 수용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2. 생시몽의 이력 (1): 클로드 앙리 드 생시몽 은 1760년 10월 17일 귀족 콩트 발타자르 앙리 드 생시몽과 그의 아내 블란세 알리자베트 사이의 아홉 명의 자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계도에는 카를 5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시몽은 어린 시절부터 개인 교사에 의해서 계몽주의의 정신과 특별 수업을 받았지만, 권위와 인습에 대해 반감을 품었습니다. 어린 시절 성찬식 참석을 거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즉 자신을 속여가면서 신을 숭배하는 일에 동참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항변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생 라자르 수도원에 감금시켰는데, 생시몽은 이곳을 탈출하여, 1777년에 군에 입대합니다.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힘든 군 생활도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1779년 11월 14일에는 대위 계급장을 취득하게 됩니다. 이때 그는 따분한 군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장난과 객기를 일삼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빚이 늘어가게 되었지만, 그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어 지속적으로 돈을 요구하였습니다. 그해 11월에 생시몽에게 프랑스를 벗어날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 마르키 드 라파예트 장군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라는 발령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가 맡은 임무는 프랑스 군이 북아메리카에 터전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프랑스 군은 미국에서 영국군에 대항하여 싸우는 미국인들의 독립전쟁을 배후에서 도우려 했습니다.

 

3. 생시몽의 이력 (2), 진보적인 기술 관료주의 그리고 생시몽의 새로운 사회를 위한 제안: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 참전한 그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습니다. “나는 자유의 실현을 위한 미국 전투에 참전한 데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미국 독립전쟁의 참전은 그의 사상을 태동하게 하는 중요한 경험으로 작용했습니다. 절대주의 봉건 체제의 앙시앵레짐이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토대로 변모되어야 한다는 것은 생시몽에게는 절대적인 당위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1783년 그가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생시몽은 이전과는 다른 인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신봉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에 자신이 맏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누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유산은 어머니에게 이전되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미국 전쟁에 참가한 프랑스 장교들을 존경하였습니다. 귀국 후에도 그는 에스파냐에 주둔하는 프랑스 군대에 머물렀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두 가지 사항을 시사해주기에 충분합니다. 그 하나는 생시몽이 귀족이라는 신분에 거부감을 느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생시몽이 의식적으로 –마치 군대조직과 같은- “기술적 관료주의의 체제라는 거대한 유형”에 열광했다는 점입니다. (Schelsky: 78). 1783년 가을, 그러니까 프랑스로 돌아오기 전에 이미 생시몽은 멕시코의 부왕 (副王)에게 자신의 중앙집권적 국가에 관한 사회적 구상을 수용해 달라고 제안할 정도였습니다.

 

4. 생시몽의 이력 (3). 운하 건설의 제안: 멕시코의 부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생시몽은 에스파냐의 정부에 다음과 같은 정책을 제안하였습니다. 그것은 마드리드에서 대서양으로 향하는 항로 건설이었습니다. 항로의 건설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재정 조달이 아니라, 6000 명의 용병이라는 인적자원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제안은 에스파냐와 프랑스 사이의 외교적 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관계로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생시몽은 이후에 안달루시아 지역을 우편마차로 잇는 통신국을 건설하려고 했습니다. 어쨌든 항로 건설은 초국가적 사업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생시몽의 이러한 거창한 계획은 수백 년을 앞서는 진취적인 사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논의에서 벗어난 말이지만, 20세기 말에 유럽의 공동의 이슈가 된 것은 라인 강, 마인 강 그리고 다뉴브 강을 연결시키는 초국가적인 운하 사업이며, 유럽 전역에 통용되는 교육 정책이었습니다. 비록 독일이 1760년대 말에는 수많은 소공국으로 분할되어 있었지만, 통일 이후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상호 이득이 되는 협동 정책을 얼마든지 추진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5. 생시몽의 이력 (4), 비록 생시몽이 앙시앵레짐에 반대했다고 하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다소 불분명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첫째로 그는 1790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한 이후에 백작이라는 귀족의 신분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처음에는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공화주의를 지지한 셈입니다. 그러나 1794년에 수많은 귀족들이 단두대에서 숙청당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그곳을 빠져나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체험을 받아들여, 원래의 세계관을 우직하게 고수하지만, 생시몽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화주의 혁명에 가담한 사람들로부터 개인적으로 끔찍한 고초를 겪었음에도, 이들을 증오하지 않고, 나중에 공화주의를 열렬히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생시몽의 인간적 중후함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가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중요하게 수용한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내적인 진취성에 기인합니다. 둘째로 생시몽은 1790년 팔비 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시장이 되라고 제안했을 때,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1793년 페론 사람들이 국가 근위대의 장교가 되어달라고 제안했을 때 그는 이러한 요청마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당시에 생시몽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혁명의 와중에서 파리의 부동산 매매를 통해서 1793년 그가 거둔 1년 수입은 18만 3천 프랑에서 32만 프랑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회계장부를 정확하게 작성하지 않아서 여러 번 자신의 사업 파트너와 갈등을 빚게 되었습니다.

 

6. 생시몽의 이력 (5): 생시몽은 당시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는 불법적인 사업 시도로 인하여 1793년 10월 혁명 당국에 의해서 체포됩니다. 그렇지만 몇몇 자코뱅주의자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납니다. 그러나 생시몽은 이 와중에서 자신의 고향인 페론에 있는 정치 클럽인 “대중 사회Société Populaire”에서 제명당하고 시당국에 의해 체포되며, 가택을 수색당합니다. 1793년 11월 19일 생시몽은 다시 체포되어 우여곡절 끝에 1794년 8월 28일에 출옥하게 됩니다.

 

19세기 초부터 생시몽은 파리에서 살롱을 경영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키웠는데, 이는 귀족 출신의 여성과의 동거 생활로써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의 삶은 조만간 파탄으로 이르게 됩니다. 어쨌든 생시몽은 일하지 않고도 자유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경제적인 부를 거머쥐었습니다. 뒤이어 그는 파리에서 살면서 약 스무 명의 하인을 거느리면서 풍족한 삶을 영위합니다. 그런데 19세기 초부터 생시몽의 경제적 상태는 하락 일로에 처하게 됩니다. 바로 이 시기에 그는 놀라울 정도의 창의성을 발휘합니다. 그의 중요한 책은 바로 이 시기부터 집필되었습니다. 그가 남은 시간에 행한 것이라고는 오로지 자신의 학문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찾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계속 이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