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이 직장에서 물러나긴 했으나,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처럼 심각한 사건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사회는 카를의 새로운 삶을 위한 시도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냅니다. 카를 에르프의 태도는 “외도”라기 보다는 자신의 보다 나은 개인적 생활을 위한 훌륭한 결정이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카를의 친구이자 동료인 프레트 만텍은 카를을 찾아와서, 카를의 현재 상황에 관해 나름대로 해석을 내리며, 베를린 행정청에서 일하는 게 어떨지? 하고 카를에게 묻습니다. 젊은 여자와의 새로운 삶을 위한 결단이란 만텍의 견해에 의하면 확고한 개성, 일관적 태도, 삶에 대한 진지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고루한 자만심, 복지부동 그리고 체념 등을 극복하고 과거의 열정 및 용기를 다시 취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베를린 행정청은 카를을 직원으로 채용하고 베를린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조처합니다. 이에 대해 카를은 내키지 않은 듯 “그래, 그래”하고 어정쩡하게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카를은 왜 이렇게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브로더 양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사회적으로 지지를 받게 되자, 그는 일순 자신의 감정을 지엽적이고 사치스럽게 느꼈던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 드 브륀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사랑하는 두 사람을 갈라놓게 하는 장애물 때문에 위대하게 표현됩니다. 왜냐하면 감정의 강인함은 바로 이러한 장애물들을 통해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애정 관계가 순조롭게 이어지는 순간, 사랑의 권태가 교묘히 작용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긴장감을 빼앗아가는 것 역시 분명히 하나의 장애물인 셈입니다.
카를은 만텍의 이러한 제안을 브로더 양에게 털어놓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는 대화 도중에 불편한 자신의 거취 문제로 인해서 그미와 다투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카를은 체제 순응적 침묵에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그는 “치과 의사에게서 몇 초간의 고통을 두려워한 나머지 일주일동안 치통을 참고 있는 아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S. 190). 이는 거의 습관적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상대방과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이라고 판단되는 경우에 그는 그것을 발설한 적이 없었습니다. 카를을 둘러싼 제반 문제에 관한 정보를 접하지 못한 브로더 양은 나름대로 자신의 직장 및 칼과의 공동 삶 등을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처음부터 브로더 양은 베를린에서 계속 머무른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카를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미는 라이프치히에 있는 동료 직장과 이곳 베를린의 자신의 직장을 맞바꾸려고 합니다. 브로더 양이 칼에게 일자리를 교환했다고 말했을 때 카를은 순간적으로 무척 놀랍니다. 그는 브로더 양에게 왜 아무런 상의 없이 그렇게 결정을 내렸는가? 하고 뒤늦게 반문합니다.
카를과 브로더 양에게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별이었습니다. 라이프치히로 떠나는 브로더 양은 마지막으로 카를에게 묻습니다. “여기 우리가 살던 집에 살지 않을 거지? 제발 솔직하게 대답해 봐.” 이에 대해 카를은 “모르겠어. 이곳에 살면 네가 생각나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하고 대답합니다. (S. 194). 일순간 당나귀에게 양쪽 건초더미가 사라진 셈이었습니다. 카를 에르프에게는 처음부터 확고한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언젠가 엘리자베트의 이혼 요구에 대해 “그냥 생각해 보자”라고 얼버무렸던 것입니다. 결국 카를은 엘리자베트와 아이들이 거주하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첫날밤을 여관에서 혼자 보낸 뒤에 카를은 발걸음을 자식과 엘리자베트가 살고 있는 옛집으로 향합니다. 마지막 대목은 독자에게 여러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한 가지 가능성을 유추하게 합니다. “아마도 엘리자베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지 모른다. 낯선 남자를 집안에 들여놓는다는 것은 끔찍하기 짝이 없어. 왜 인간이 스스로 변하지 않겠는가? 과연 엘리자베트의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S. 197).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구동독에서는 다음과 같은 입장이 거의 통념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개개인들이 행복을 누려야 하는 데 있다. 결혼 체제 내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한 자는 다른 생활 방식을 동원할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드 브륀은 소설 내의 주변 인물 하슬러를 통해서 마르크스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게 합니다. “사랑 없는 죽은 결혼 생활을 마지못해 고수하는 것이 오히려 비도덕적이다.” (S. 135). 따라서 불행과 갈등을 마치 순교자처럼 견뎌내며 가정을 지키는 것은 적어도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부부가 헤어지는 것보다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소설의 근본적 문제는 결혼의 윤리에 관한 제반 사항을 비켜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소설의 핵심적 주제는 카를과 브로더 양의 이별의 상징성이며, 우리는 이별의 상징성을 카를 에르프의 내적 인간형 및 그가 처하고 있는 외부적 정황에서 포착해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카를 에르프가 브로더 양과 헤어진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카를의 몇 가지 습관적 버릇들 (우유부단함, 나태함, 체제 순응주의 등)이 악재로 작용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카를의 어떠한 내적 특성이 하자로 지적될 수 있을까요? 문제는 무엇보다도 카를의 자기를 기만하는 악습에 있습니다. 카를은 적개심, 불신 등과 같은 모순에 대해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은폐시킵니다. 말하자면 카를에게는 불확실한 것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타인에게 불편하고 직선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이는 다음의 사항을 상징합니다. 즉 카를 에르프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과도기적인 사회내의 여러 가지 모순을 지적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키면서 사회적 삶을 변모시키지 못한다는 사항 말입니다. 자기 기만성은 창조적 변모를 용인하지 못하고, 지금까지의 삶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나쁘게 작용합니다. 이로써 나타나는 것은 바로 체제 순응주의가 아닌가요?
어쩌면 카를 에르프는 사회 자체를 의인화한 체제 순응주의적 인물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물론 드 브륀은 처음부터 어떤 사회적 대안 내지는 해결책을 작품 속에 명시적으로 혹은 묵시적으로 삽입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드 브륀은 최소한 바람직한 변화는커녕 스스로를 합리화하기에 급급한 인간형 내지 현재 상태만을 강조하는 과도기적 사회 체제를 은근히 비난하려고 한 게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소설의 테마를 “국가 체제에 대한 맹목적 비난”이라고 결과론으로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작가가 보건대 소위 전체를 위한다는 사회주의적 사회는 개인의 가장 내밀한 사생활에서의 행복마저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드 브륀은 이를 예리하게 비판하고 하나의 대안을 스스로 발견하라고 독자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동독 국가 체제에 대한 전적인 거부라든가 사회주의적 이상에 대한 급진적 부정 등은 70년대 이후 간행된 드 브륀의 작품에서 현저하게 드러납니다. 요약하자면 작가는 겉으로는 사랑과 혼외정사를 묘사하지만, 속으로는 체제옹호적인 인간형의 비열함, 동독 사회의 관료주의의 체제 등의 문제를 독자에게 은밀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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