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J, 오늘은 1997년에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유렉 베커 (Jurek Becker, 1937 - 1997)의 장편 소설, 『권투선수 Der Boxer』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1976년에 발표되었습니다. 베커는 이전의 작품에서 제3제국에서의 유대인 박해 문제 및 그 결과에 관해서 집요하게 추적해 왔습니다. 가령 『거짓말쟁이 야곱 Jakob der Lügner』(1969)은 폴란드에 위치했던 게토의 일상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권투선수 (Der Boxer)』는 전후 독일에서 살고 있는 과거 강제수용소 간수의 삶을 투영합니다. 나중에 이 문제는 『브론슈타인의 자식들 Bronsteins Kinder』(1986)에서도 유대인의 세대 사이의 갈등이라는 주제로 발전되었습니다.
베커의 작품은 권투 선수에 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른바 끔찍한 삶이라는 사각형의 링 속에서 생존을 위해서 사투를 벌여온, 어느 유대인 남자의 고난의 삶을 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인공은 유대인 아르노 블랑크 (Arno Blank)입니다. 그는 왕년에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적이 있습니다. 아르노는 전쟁이 끝난 뒤에 동베를린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원래의 이름은 “아론 (Aaron)”인데, 자신의 이름을 독일식으로 “아르노”로 바꾸어 당국에 신고합니다. 이때 자신이 태어난 해 (年)를 6년 전으로 앞당겨서 기록합니다.
아르노는 자신이 강제수용소에서 보낸 6년의 세월을 뇌리에서 지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모든 것을 잊고 새롭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아르노의 아내와 두 아이는 살해되었으며, 막내아이는 전쟁 동안에 실종되었습니다. 아르노는 막내아이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그는 구호단체를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호소합니다. 다행히 여섯 살 난 마르크가 마침내 발견됩니다. 친애하는 J, 상기한 내용은 무척 자전적 요소를 풍깁니다. 실제로 베커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뒤에 그런 식으로 아들, 유렉을 찾게 되니까요.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마르크는 전후의 시대에 동 베를린의 어느 소년원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르노는 마르크가 정말로 자신의 아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어쨌든 아르노는 아들로 인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여러 가지의 계획을 구상합니다.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주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이때 그는 파울라를 잠깐 친분을 쌓습니다. 그미는 사설 구조단체에서 일하는 여자로서, 아르노는 그미의 도움으로 아들 마르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르노는 파울라와 함께 살아가려고 내심 마음먹고 있었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파울라 역시 과거의 남자친구 두 사람을 우연히 재회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케닉 그리고 오스발트라는 남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전후의 독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친애하는 J, 가족이 누군가에 의해서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홀로 남게 된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가족이 참혹한 불행을 당하면, 살아남은 자들은 순간적으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밤에도 악몽에 시달리며 잠을 못 이룰 테지요. 케닉과 오스발트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결국 케닉은 과거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주위의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팔레스티나로 떠나는 반면에, 오스발트는 목을 매고 자살합니다. 그렇지만 아르노는 이들과는 달리 계속 열심히 살기로, 그것도 독일인의 땅에서 뿌리를 내리기로 결심합니다. 만약 아르노가 아들을 찾지 못했더라면, 그는 아마 더 이상 생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들의 존재가 그의 마음속에 삶의 의욕을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마르크는 소년원에 근무하는 간호원, 이르마를 마치 어머니처럼 좋아했습니다. 아르노는 이를 목격합니다. 그는 오로지 아들을 위하여 이르마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삽니다. 말하자면 이르마가 그의 아내가 된 것입니다. 이로써 아르노는 하나의 가족을 결성합니다. 세월은 빨리 흘러서, 십여 년이 지나갑니다. 친애하는 J, 서양의 경우 가족의 응집력은 대체로 동양의 경우보다 강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한 인간이 오로지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고 기이하게 간주되지요. 우리는 아르노의 태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유럽 사람들은 그의 희생적 태도를 무척 신기하게 여깁니다.
어쨌든 마르크가 장성했을 때, 아르노의 가족은 안타깝게도 해체될 위기에 처합니다. 아르노는 삶에 대한 피곤함을 술로써 감추어왔으나, 더 이상 지금까지 숨길 수 없습니다. 내적인 소외감은 외부적 현실에서 그로 하여금 고독하게 살아가게 합니다. 이르마는 주인공에게 유일한 벗이자, 대화 상대자였는데, 어느 날 어디론가 종적을 감춥니다. 아들 마르크는 어느 날 팔레스티나로 이민을 떠나버립니다. 이스라엘에서는 1967년 6월 전쟁이 발발합니다. 이스라엘은 주위의 팔레스티나 국가들과의 영토 분쟁 문제로 시리아 그리고 이집트의 인접 지역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 전쟁은 불과 5일 동안 이어졌으나, 중동 지역의 지속적인 갈등의 시발점으로 이해됩니다. 어느 날 아르노는 더 이상 아들로부터 편지를 받지 못합니다. 그는 아들이 전쟁에서 전사했다고 믿습니다
친애하는 J, 과연 아르노를 둘러싼 삶의 이야기가 실제 현실에서 일어난 것일까요? 우리는 이에 대해 정확히 답할 수 없습니다. 다만 베커의 소설 구성의 원칙을 고려할 때 우리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요. 소설의 화자는 어느 젊은이인데, 아르노와의 2년 동안의 만남을 토대로 모든 것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아론은 자신의 대화 상대자에게 자신이 겪었던 모든 것을 토로합니다. 말하자면 아르노의 발언에는 쓰라린 유머가 담겨 있습니다. 한 사람의 체험은 그대로 전해지는 게 아니라, 다른 면담자의 기록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전해질 뿐입니다.
'45 동독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로박: (2) 귄터 드 브륀의 '부리당의 당나귀' (0) | 2023.05.21 |
---|---|
서로박: (1) 귄터 드 브륀의 '부리당의 당나귀' (0) | 2023.05.21 |
서로박: (5) 유렉 베커의 '브론슈타인의 자식들' (0) | 2023.05.17 |
서로박: (4) 유렉 베커의 '브론슈타인의 자식들' (0) | 2023.05.17 |
서로박: (3) 유렉 베커의 '브론슈타인의 자식들' (0) | 2023.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