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 단상

(단상. 569) 당신에게 나는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필자 (匹子) 2023. 5. 18. 11:32

친애하는 M, 보내드린 나의 책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4"를 잘 받았는지요? 퇴직 후에도 집필에 몰두하는 이유는 오로지 젊은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흙문학 아카이브를 개설한 것도 그 때문이지요. 내가 지는 태양이라면, 당신은 뜨는 태양이지요. 이제와서 나에게 명성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상과 공적이 무슨 커다란 기쁨을 줄까요? 그렇지만 나는 -황지우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최소한 당신에게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가 되고 싶습니다. 

 

오늘은 스승과 제자에 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고로 스승과 제자는 시대착오적 개념으로서 이조시대에 사용된 바 있습니다. 비의적인 학문을 습득하려고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선생을 찾아와 3년 동안 허드렛일을 하며 머슴처럼 지내다가, 고매한 학문을 전수하고 습득한 사람들을 제자라고 칭합니다. 그들은 배움의 전수를 위해서 서로 피룰 나누면서 맹세하곤 했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이러한 내밀한 혈맹 관계는 좋든 싫든 간에 현대 사회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학교는 과거와는 전혀 다르게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새 술이 헌 부대에 담겨서는 곤란할 것 같습니다.

 

필자는 체질적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주종관계를 싫어했습니다. 학교에 적을 두고 있을 때 필자는 유독 사은회라든가 스승의날 행사를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사은회, 혹은 스승의 날 행사가 열리면 일부러 다른 핑계를 꺼내어 참석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요. 그래서 학생들은 아마도 필자의 이러한 태도에 마음속으로 섭섭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필자가 몇몇 선생님 그리고 학생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함께 교실에서 공부했던 소중한 학생들을 생각하면, 그들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속에서 벌컥 솟아오르곤 합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세요. 선생과 학생 사이에는 일대일의 평등한 관계가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유교적 전통 때문일까요? 물론 전통적인 관습 가운데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격언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이 가르치는 자를 대체한다고 해서, 오늘날 AI의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과거를 돌이켜보면, 필자에게는 경애하는 선생님도 계셨지만, 선생답지 않은 선생들도 즐비했습니다. 학생들을 노예로 대하는 선생들에게 분개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회초리를 들고 호령하는 선생을 대할 때 필자의 저항감은 극에 달하곤 했습니다. 이 세상에 사랑의 매는 없습니다. 이것은 권위주의적 선생이 말하는 자기 합리화 내지는 변명일 뿐입니다. 폭력은 그 자체 폭력이며, 다음 세대에 폭력을 재생산하게 만듭니다. 맞고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몽둥이를 거머쥐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교육은 채찍이 아니라, 당근이어야 합니다. 요즈음 중등학교에서 회초리를 들면, 난리가 나지요.

 

친애하는 M, 선생과 학생은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친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뒤에서 욕할 게 아니라, 면전에서 상대방을 이성적으로 비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선생이라고 해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학생은 선생의 잘못 역시 면전에서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억누르게 되면, 노여움은 제3자에게 전달되지 않는가요?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경우는 부지기수로 출현합니다. 제3자에 대한 비난은 하나의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나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곤 합니다. 

 

헤어진 동창들을 다시 만나는 것은 참으로 뜻깊습니다. 좋은 사람을 다시 만나는 것만큼 세상에서 즐거운 일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다른 한편 동창회의 결성은 묘하게도 부작용을 낳습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끼리끼리 모이면,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배척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로써 싹트는 것은 씨족 이기주의입니다. 이를 청산하기 위해서 우리는 연습을 필요로 합니다. 면전에서 선생의 의견을 비판해야 하고. 친구를 만날 때에도 애정어린 비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제3자의 장점만을 전해야 하겠지요. 선생과 학생, 선후배가 뒤섞인 곳에서는 자유로운 토론의 문화가 자라나기 어렵습니다.

 

필자는 한반도의 역사에서 무엇보다도 통일신라가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해야 했는데, 경상도의 작은 국가가 삼국을 통일했습니다. 그러니 발해라는 나라를 끌어안지 못했지요. 필자가 말하는 악영향은 한민족의 기운, 함석헌 선생의 표현을 빌면- "송아리얼"이 대륙으로 뻗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는 점, 골품 제도, 화랑제도의 특권계급 등을 가리킵니다. 특권계급으로 인하여 당동벌이가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특권층은 당파를 만들어 자기네끼리 똘똘 뭉치고, 비-특권층은 이러한 당파에서 배척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악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윤석열 정권은 특권층인 대기업의 자본가를 친구로 대하고, 비특권층인 노동조합 사람들을 적으로 내몰지 않습니까?

 

필자는 이를테면 나이를 따지는 것을 몹시 싫어합니다. 친구 관계를 맺는 데 나이가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서양에서는 60대 노인도 10대 젊은이와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언젠가 필자는 부산에서 우연히 15세의 중학생을 알게 되었는데, 서로 친구로 지내자고 말하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나의 행동은 늙은 사내가 여중생에게 치근덕거리는 것으로 비쳤던 것입니다. 오해는 즉시 풀렸지만, 씁쓸한 마음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습니다. ㅠㅠ 각설, 필자는 다음과 같이 외치고 싶습니다. "스승과 제자는 없고, 친구만이 있을 뿐이다.Non sunt magistri et discipuli, tantum amici." 친애하는 M, 오로지 우정만이 우리의 관계를 풍요롭게 해줄 것입니다. 그러니 필자를 편안한 마음으로 친구로 대해주세요.

 

 

교육은 채찍이 아니다. 1642년 라틴어 학교에서 폭력을 가하는 교사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