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림 (명저)

(명저 소개) 장영태 역: 횔덜린 서한집

필자 (匹子) 2022. 10. 17. 09:09

 

2022몀 임다 출판사에서 횔덜린 서한집이 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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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관심은 1798년 이후의 편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횔덜린은 자신의 삶, 사회의 발전 그리고 역사적 진보를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 왔지만, 자신의 모든 노력이 더 이상의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당시의 문학적 풍토는 괴테와 실러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젊은 작가를 돕고 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비난하는 등 낭만주의의 다양한 흐름을 수용하지 못하고, 그것을 오로지 하나의 부정적인 성향으로 치부했습니다. 둘째로 유럽 중부의 정치적 사회적 풍토는 진부한 봉건주의를 탈피하지 못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조금씩 발전되던 초기 자본주의는 독일 땅에서 만개하지 못했습니다. 셋째로 독일은 수십 개의 공국으로 분할되었으며, 이러한 토대 하에서는 평등 사회는 고사하고, 시민 주체의 이념조차도 성장할 수 없었습니다. 넷째로 산업 혁명의 여파로 수학의 발달과 병행하여 사람들은 계산을 중시하는 양적 사고 내지 자연과학을 중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영혼적인 것, 여성적인 것 그리고 감성적인 것은 실증주의의 현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됩니다. 상기한 네 가지 사항은 인문 사회과학을 불필요한 학문으로 매도하는 천박한 실증주의자들의 견해를 정당화시킬 뿐 아니라. 철학자, 시인, 예술가 등은 사회에서 쓸모없는 존재라고 낙인 찍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횔덜린의 서한집은 문학 작품과는 달리 시인 자신의 개인적 감정, 문학적 입장 그리고 세계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강점을 지닙니다.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편지는 -주관적인 견해입니다만- (1)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 (2) 실러에게 보내는 편지 (3) 친구이자 문우인 카시미르 울리히 뵐렌도르프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가운데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일단 횔덜린과 실러의 관계는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언젠가 실러가 횔덜린의 시 "그리스Griechenland"를 접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고대 그리스를 대하는 횔덜린의 입장이 자신과 다를 뿐 아니라, 그 수준 역시 대단하다고 내심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집필한 시 "그리스Griechenland"와 비교합니다. 횔덜린의 시 그리스는 자신이 쓴 시 그리스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실러는 단순히 자유의 이상을 구현한 고대 그리스를 동경했지만, 횔덜린은 고대 그리스의 자유에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첨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복합적 감정을 시 속에 담을 수 있었던 계기는 슈바벤 경건주의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실러는 횔덜린 문학의 독창적 위대성을 감지하게 됩니다. 문제는 실러의 내면에 횔덜린에 대한 경쟁심 내지는 질투심이 끓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횔덜린에 대한 실러의 질투심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실러는 재능 넘치는 젊은 시인, 횔덜린을 철저히 무시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야 젊은 시인이 자신을 밟고 일어서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횔덜린으로서는 스스로 문학적으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실러의 도움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실러의 반응은 냉담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이마르에서 문학적 성공을 거둔 실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지속적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실러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저에 대한 선생님의 침묵은 저를 참으로 의기소침하게 만듭니다. (...) 저에 대한 생각을 바꾸신 건가요? 아니면 저를 포기하셨나요?” (224쪽) 어쩌면 횔덜린이 작가로서 성공을 거둘 수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실러가 그의 재능을 알면서도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횔덜린은 괴테에게도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괴테는 그에게 다반 짤막한 시, 즉 단시만 쓰라고 충고하였고, 아무런 관심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젊은 작가들은 처음부터 괴테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괴테는 실러에게 편지를 보내, "홀터라인Holterlein이라는 이름을 지닌, 봉두난발의 젊은 작가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말했습니다. 횔덜린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대가가 괴테였습니다.

 

이번에는 친구인 뵐렌도르프에 관한 편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뵐렌도르프는 놀라운 시를 썼는데, 시의 발표가 차단되자, 방랑하면서 살다가 50세의 나이에 권총 자살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횔덜린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운명을 지니고 있소." 횔덜린은 친구인 뵐렌도르프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거들떠 보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말하자면 새로은 시대에 가장 고결한 삶의 가치를 알려주는 전령사인데, 돈이 없다는 이유로 그리고 힘이 없다는 이유로 예나 지금에나 간에 거지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민족적인 것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소." 당시에는 민족주의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게르만 민족은 언제나 핍박당하고, 경멸당하며, 조롱 받는 인종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망각된 가치를 되찾으려는 고결한 자세일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민족주의와는 차원이 다른 개념입니다.

 

"이제 나의 조국을 떠나고자, 어쩌면 영원히 떠나고자 결심했을 때 나는 쓰라린 눈물을 흘려야 했소. Es hat mich bittere Tränen gekostet, als ich mich entschloß, das Vaterland zu verlassen. 도대체 이 세상에 나에게 더 사랑스러운 것이 무엇이란 말이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소." (477쪽)

 

시인과 예술가의 작품 가치는 대체로 생전에 인정받지 못합니다. 예술 작품은 한 시대가 지나야 비로소 본연의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일반 사람들은 그만큼 천재 작가의 예술적 위대성에 둔감하다는 말입니다. 인간과 문학의 가치는 이렇듯 세인에게 발견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소시민들은 자신의 경제적 사정 그리고 날씨에 관해서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문학은 그 자체 오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가장 많이 읽히는 소실인 돈키호테는 주인공과 세인들 사이의 오해 내지는 위화감을 주제화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장영태 교수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횔덜린의 소중한 편지들을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였습니다.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