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명시 소개) (4) 타향에서 고향 찾기, 이교상의 연작시 "담양에서 쓰는 편지"

필자 (匹子) 2022. 7. 8. 11:14

(앞에서 계속됩니다.)

 

6. 고향의 심리적 의미 (자아)

 

: 세 번째 주제인 고향의 심리적 의미 역시 상기한 사항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요?

: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의 자세 내지는 사명일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학을 통해서 “댓잎”과 같은 삶의 자세를 견지해 나가는 일일 것입니다. 시인은 단양 지역의 여행을 통해서 자신을 성찰하고, 시 창작을 통해서 자신이 왜 존재하는가를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 “말의 거품”을 가려내고, “헛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은 말하자면 창작 행위를 통해서 실현된 셈이네요?

: 네, 젊은 시절에 시인은 가난과 고독 속에서 자신을 안데르센의 동화에 등장하는 “미운 오리새끼”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시 창작을 통해서 자신이 오리가 아니라, 찬란한 백조라는 놀라운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 그렇다면 연작시는 문학의 삶을 통한 “갱생”의 의미 내지는 “부활 resurrection”의 함의를 전해주고 있군요.

: 그렇지요, 부활과 갱생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는 일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 부족하고 어리석은 과거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그것을 얼마든지 새로운 삶 내지는 부활이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너: 연작시도 이와 관계되겠군요.

 

: 이교상 시인은 카를 마이를 연상하게 합니다. 독일 작가, 카를 마이 (Karl May, 1842 - 1912)의 소설 가운데에는 『비네투』라는 인디언 소설이 있습니다. 등장인물 올드 셰터핸드는 키 작고 불품 없는 사내인데, 주위로부터 항상 놀림을 당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사격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여 사격술을 익힙니다. 나중에 악당을 물리치는 자가 바로 주인공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신의 능력을 뒤늦게 발견한 다음 한 길을 걸어가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 선생님의 말씀을 요약하자면, “갈망 그리고 갈망의 서술을 통한 나 자신의 변모”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씀이지요? 세계를 변화시키기 전에 나 자신부터 변모해나가라는 브레히트Brecht의 전언이 떠오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든 간에 어떤 특출한 재능이 잠재해 있는데,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 그렇습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자신의 미셀러니, 『흔적들Spuren』에서 이러한 특성을 “익명 존재의 승리”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제각기 자신의 잠재력을 찾아내어 이를 연속적으로 계발해나가야 하겠지요.

 

7. 고향의 철학적 의미 (시간)

 

: 교육자다운 말씀이로군요. 시인이 타향에서 이전에 갈구했던 고향을 찾는다는 것은 그 자체 커다란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이 어째서 고향의 철학적 의미와 관련되는 것일까요?

: 우리가 예의 주시해야 할 시는 「누에에 대한 고찰」입니다. 시인은 누에를 바라보며 “네 번 잠을 자고 다섯 번 꿈을 꾸는” 삶을 성찰합니다. 잠을 자고 꿈을 꾸는 행위는 탄생과 죽음의 행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숙고하며, 유년 그리고 장년, 탄생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 위대한 그리스 비극작가, 소포클레스Sophokles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Οἰδίπους ἐπὶ Κολωνῷ」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태어나지 않는 게 최상의 행복이다.” 이 말이 시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요?

나: 글쎄요. 소포클레스에게 운명은 어깨를 내리 누르는 바위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최상의 행복보다도 두 번째 차선책을 말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즉 태어난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게 두 번째 행복이라고 말입니다. 소포클레스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다음을 주장하려고 했습니다. 즉 운명을 회피할 수는 없지만,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 문제는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욕구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시인의 욕구 내지는 귀소본능은 과거지향적 퇴행으로 해석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나: 동의합니다. 이교상에게 고향의 의미는 과거지향적인 회귀 내지는 퇴행이 아니라,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의 측면이 강합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별”, “댓잎” 그리고 “그린내”를 강조하고 있어요.

: 잘 알겠습니다. 이제 시간적 관점에서 고향의 의미를 말씀해주시지요?

: 네. 인간 삶을 편의상 청춘 시절과 장년의 시절로 나누어봅시다. 청년은 어디론가 떠나가려고 하고, 모험을 즐기며, 고향을 벗어나려고 합니다. 이에 비하면 장년은 가족과 함께 지내려 하고, 안정과 휴식을 원하며,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려고 하지요.

 

: 예리하게 파악하셨네요. 역사는 분산과 집약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언젠가 독일의 철학자, 셸링Schelling은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분산의 여정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서술되어 있다면, 집약의 여정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서술되어 있다. (...) 『일리아스』가 원심력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오디세이아』는 구심력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 그렇군요.

: 셸링은 일리아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오디세이아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행위를 고대에 거대한 영토를 점령했던 알렉산더 대왕의 행적과 비유하고 있습니다. 전자가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정벌 내지 영토 확장으로 비유될 수 있다면, 후자는 50 나이에 접어든 알렉산더 대왕의 귀환과 비유될 수 있습니다.

 

: 인류의 역사를 분산 집약으로 요약한 것도 놀랍지만, 이를 호메로스의 두 편의 서사시로 설명한 점 역시 참으로 대단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자신이 살았던 지역으로 돌아가서 이전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하지요. 이교상의 작품도 이러한 정서에서 동떨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 그렇겠지요. 사실 『담양에서 쓰는 편지』는 장년의 시기에 완성된 연작시입니다. 시인이 애용하는 시어, “애저녁”의 시간적 함의를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초저녁을 가리킬 뿐 아니라, 장년기를 지칭하고 있어요. 작품의 주제는 분산이 아니라, 집약을 다루고 있고, 원심력이 아니라, 구심력을 보여주며, 모험의 욕구가 아니라, 귀소의 욕구를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 요약하건대 이교상의 연작시는 타향에서 고향을 찾으려는 정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는 단순히 과거의 장소를 동경하는 차원을 넘어서, 어떤 더 나은 삶의 공간과 시간을 갈구하는 마음가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시인의 고향은 유토피아의 정서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