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에 쓰여 있는 王이라는 글자 - 이 역시 하나의 퍼포먼스인지 모른다. 나라를 다스리고 싶은 야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 대장부라면 누구나 한번쯤 품을 수 있는 욕망일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를 위한 욕망인가? 일순간 하나의 일화가 필자의 뇌리에 스쳤다. 그것은 한자로 점을 치는 기인에 관한 이야기다.
때는 바야흐로 기원 후 910년 무렵이었다. 여름이 끝날 무렵 개성으로 향하는 양주 근처의 길목 장터에서는 한자로 점을 치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64개의 골판지에다 제각기 다른 한자를 써넣은 다음에, 이것들을 땅 위에 가로 여덟 개, 세로 여덟 개로 배열해 놓았다. 이곳의 토박이와 장돌뱅이들은 그 앞에 모여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사내는 동전 몇 닢을 받은 다음에 글자를 가리키는 사람의 운세를 알려주고 있었다. 참으로 용하다고 소리가 장터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었다. 바로 이 무렵 어느 높은 지위의 사람이 바로 이곳을 지나치게 되었다. 약천은 궁예 휘하에서 일하다가 최근에 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궁예의 부탁으로 민심을 살피기 위해서 허름한 변복 차림으로 잠행의 길을 나섰던 것이다. 남루한 평복을 걸쳤으므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약천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한자들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천자문의 평범한 글자들만 나열해 있었다. 그런데 한자어 가운데 가장 쉬운 글자인 “一”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약천은 땅위에서 “一”자를 그으면서, 점을 쳐달라고 사내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점치는 사내는 자기 고개를 치껴들어서 낯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그에게 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아니” 하고 약천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왜 그러시오?” 바로 이 순간 사내의 입에서 예기치 않은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폐하, 소인을 용서하시옵소서. 장차 왕으로 등극할 폐하를 알아차리지 몰랐사옵니다.”
약천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대꾸했다. “아니, 폐하라니. 어찌 그런 얼토당토한 말을 내뱉는단 말이오?” 이때 사내는 대답했다. “땅 위에 ”一“자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의미를 표현한 것입니다. 흑 ‘土’자 위에 날 ”一“ 자를 더하면, 그것은 왕 (王)을 가리키지요.”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약천은 일순간 사내를 훈계해야 했다. “말조심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관아에 끌려가서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오.”
집으로 돌아온 약천은 글자로 점을 치는 사내의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았다. 아니, 자신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된다니,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렇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야심이 솟구치고 있었다. 왕이 된다는 생각을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점을 치는 사내가 무척 의심스러웠다.
용한 점쟁이인가, 아니면 혹세무민하는 사기꾼인가? 이 문제를 밝히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 약천은 자신의 부하에게 동전 꾸러미와 좋은 옷을 건네면서 다음과 같이 명했다. “자네, 4일 후에 이 옷을 걸친 다음에 길목 장터로 가서. 글자 점을 쳐 보게. 몇 번 다른 글자로 운세를 본 다음에 바닥에 날 ‘一’자를 쓰면서 자네 명운이 어떻게 될지를 물어보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상대방이 자네가 누구인지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해야 하네.” 약천의 부하는 명을 받들겠다고 말하면서, 동전과 옷을 받아들었다.
열흘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때 누군가 자신에게 한 가지 소식을 전해주었다. 관아의 옥사에 자신의 부하가 갇혀 있다는 소식이었다. 약천은 관아를 찾아가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어째서 자신의 부하가 옥사에 갇혀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때 고을의 사또는 허리를 굽히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시중 어른, 장터에서 글자 점을 치다가 주먹다짐이 발생했습니다. 한 사내가 땅 위에 날 ‘一’자를 가리키며, 점을 봐달라고 말했을 때, 점쟁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더군요. 이 자가 몇 년 후 비명횡사하게 되리라고 말이지요. 말하자면 흙 土 위에 날 一은 쓰러져 목숨을 잃는 시신을 가리킨다나요? 봉분 없는 시체의 형상이라는 것이었어요. 이 말을 듣자, 이 자는 점치는 사내의 멱살을 붙잡았는데, 이 와중에서 난장판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시중 어른의 부하인줄 모르고 옥사에 구금하였습니다. 나의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덧붙이는 글: 약천은 충격을 받아서 달포 동안 칩거했다. 글자로 점을 치는 사내의 말이 어쩌면 사실일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년 후 약천의 부하는 궁예를 호위하는 군인들과 칼부림을 벌이다가 전사했는데, 소문에 의하면 그의 시신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못했다고 한다. 약천은 몇 년 후에 고려를 건국하였다. 그가 바로 왕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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