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bloch 대화

블로흐와 아도르노의 유토피아 논쟁 (3)

필자 (匹子) 2021. 9. 7. 12:07

아도르노: 헤겔은 가능성의 개념을 나쁘게 언급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블로흐: 가능성의 개념은 헤겔에 의해서도 나쁘게 다루어졌지요. 헤겔은 가능성에 대한 종래의 견해를 어쩔 수 없이 수용하면서 가능성을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개념으로 취급하고 말았지요. 실재하지 않는 것은 어떠한 가능한 무엇도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가능한 것은 헤겔의 견해에 의하면 현실적인 것으로 직결되었으니까요, 말하자면 그것이 현실적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다고 헤겔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능성의 카테고리는 헤겔의 경우 하나의 주관적 성찰의 카테고리였습니다.

아도르노: 가능성이란 개념이 그냥 지붕 꼭대기 위로 올라간 셈이로군요.

 

블로흐: 그런 셈이지요 가능성의 개념은 처마위로 올라갔지만, 지붕 밖으로 돌출해 나오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가능성은 마치 하나의 대양과 같아서, 주어진 현실이라는 통상적 영역보다 훨씬 넓고 광활하지요. 그렇기에 나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가능성을 “활용가능한 도구적 특성 Zurhandenheit”으로 명명하고 싶습니다. (블로흐가 사용한 “활용가능한 도구적 특성Zurhandenheit”은 마르틴 하이데거가 사용한 전문적인 조어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일상적 삶에서 활용되는 도구들을 서술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이에 반해 일상의 삶에서 사용될 수 없는 도구의 특성은 “활용 불가능한 도구의 특성Vorhandenheit”이라고 한다. - 역주)

아도르노: 글쎄 그럴까요?

블로흐: 사람들은 가능성의 개념을 “고유성의 은어(隠語)로 혹사시키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쁜 쪽으로 몰아붙인 것은 사실이지요. (여기서 “고유성”이라는 표현은 설명을 요한다. 아도르노는 실존주의의 언어와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위해서 『고유성의 은어 Jargon der Eigentlichkeit』를 집필 발효하였다. Theodor Adorno: Jargon der Eigentlichkeit, Zur deutschen Ideologie, Suhrkamp: Frankfurt a. M. 1964. - 역주) 세상을 가능한 무엇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전적으로 꺼리면서, 가능성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매도했습니다. 이러한 의향은 분명히 드러나고 있어요. 아주 강렬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가능성 개념을 유토피아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비난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철학의 영역에서는 가능성의 개념은 유토피아와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매도되기 일쑤였어요.

 

아도르노: 네, 크뤼거씨가 조금 전에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것은 유토피아적인 것의 내용에 관한 물음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블로흐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유토피아의 의식과 관련되는 여러 가지 이질적인 유형의 그림들을 총동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실과의 관련성 하에서 언급되어야 해요. 유토피아의 내용을 그런 식으로 개별적으로 포착되는 것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전체적 특성을 언급할 경우, 그것은 인간의 공동적인 삶의 시스템만 생각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카테고리가 자신의 고유한 구성에 따라 변화될 수 있음을 고려하고 있어요.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유토피아는 어떤 특정한, 개별적으로 포착된 카테고리가 변화된다는 사실만을 강조하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카테고리는 시스템 내의 모든 것을 구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카테고리 하나만 가지고, 그것을 유토피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라고 간주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크뤼거: 자유의 카테고리 역시 유토피아가 추구하는 방향이 아닌가요?

아도르노: 자유의 카테고리 또한 고립된 것이 아니지요. 만약 자유의 카테고리 하나만을 유토피아의 열쇠로 간주하는 식으로 문제에 접근한다면, 관념론의 내용은 정말로 유토피아와 동일한 것으로 나타날 테지요. 왜냐하면 관념론은 행복의 실현을 동시에 생각하면서 자유의 실현을 강렬하게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카테고리들이 출현하고 있는 관련적인 특성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행복의 카테고리는 고립된 것으로서 한상 가련한 무엇으로서 다른 것들을 현혹시키면서도 스스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자유의 카테고리 역시 마찬가지지요. 그것은 더 이상 스스로 목적을 지니지 않는데도 내면성의 자기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믿으며, 유토피아주의자들은 그것이 실현 가능성하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물론 당신이 이 문제를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어요. 최근에 나는 바로 이 문제를 놓고 여러 가지 생각으로 골몰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언급한 죽음의 철폐에 관한 문제는 신경의학적인 관점인 것은 분명해요. 바로 이것이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이를 확신할 수 있어요. 언젠가는 이른바 “올바르게 사고하는wohlgesinnt” 사람이라면 죽음의 철폐의 가능성에 관해 토론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올바르게 사고하는”이라는 용어를 발견하고 자신의 논의에 활용한 사람은 울리히 존네만Ulrich Sonnemann인데, 그의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울리히 존네만 (Ulrich Sonnemann, 1912 - 1993): 독일의 철학자, 심리학자, 정치적 작가. 그의 대표작은 1969년에 발표된『부정적 인간학. 운명의 사보타지를 위한 선제적 연구 Negative Anthropologie. Vorstudien zur Sabotage des Schicksals』이다. 여기서 존네만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견해를 따르면서 자유, 진리, 자발성을 강조하였다. 대신에 그의 저항은 무의식적으로 조금씩 성장하는 국가의 권위로 향하고 있다. - 역주)

 

가령 다음의 사항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 어느 파출소 앞에서 돌을 던지면, 경찰관 한 사람이 문 바깥으로 뛰쳐나와서 즉시 이를 제압하는 행동을 벌이게 될 것입니다. 만약 죽음이 철폐된다고 가정하면, 바꾸어 말해서 인간이 더 이상 죽지 않는다고 가정하게 되면, 그것은 정말로 가장 끔찍하고, 어쩌면 가장 소름끼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반작용의 형태야 말로 유토피아의 의식에 대해 가장 즐비하게 대항하는 무엇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간이 기존하는 구체적 사회 현실 속에서 동질성을 유지하게 되는데, 만약 이러한 질서의 틀이 벗어나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이 죽음과 동질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유토피아의 의식은 한마디로 궁극적으로 인간이 더 이상 죽을 필요가 없는 어떤 가능성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어떤 끔찍한 무엇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어쩌면 인간이 원래 갈구하는 무엇과는 정 반대되는 무엇을 지칭합니다.

 

에른스트, 당신은 조금 전에 “활용 가능한 도구적 특성Zurhandenheit”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요? 하이데거는 죽음 없는 어떤 인간 존재의 가능성에 관한 질문 자체를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했지요. 그것은 현재 살고 있는 자가 제기할 수 있는 단순한 존재론적인 질문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기했습니다. 만약 죽음이 현존재의 영역에서 존재론적으로 사라지게 되면, 그것은 자신의 절대적 존재론의, 즉 본질에 합당한 품위를 획득하게 된다고 합니다. 현대 철학에서 죽음을 이런 식으로 구원하는 처사 내지 죽음을 절대화시키는 태도는 지극히 반유토피아적이라고 생각되는데, 이것이야 말로 핵심적 카테고리라고 여겨집니다. 요약하건대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어요. 유토피아로 명명되어질 수 있는 유일한 카테고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사회 전체의 복합체가 어떤 식으로 결정되는지를 고찰하려고 한다면, 이 문제야 말로 가장 활발히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이겠지요.

 

크뤼거: 블로흐씨, 당신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멸한다는 생각은 유토피아의 사고 아래에 가장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는 가장 합법적인 논거가 아닐까요?

블로흐: 죽음의 문제를 고려하는 영역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사항을 다루는 의학의 영역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와 반대되는 신학의 영역입니다. 기독교는 기원 후 1세기에 다음과 같은 외침으로 승리를 구가하였지요.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로다.” 산상수훈을 통해서, 종말론을 통해서 승리를 구가한 게 아니었습니다. 죽음은 가장 완강한 반 유토피아를 표현하고 있지요. 마지막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완전히 전복되고, 우리 모두의 개인적 삶이라는 목적을 강화하게 했습니다. 이전의 그리스도의 혁명적 가르침은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어요.

 

만약 그렇지 않았으면 어땠을까요? 볼테르는 아무런 위안을 가져다주지 않는 그림 하나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좌초된 선박에서 살아남은 자의 아무런 위안을 찾을 수 없는 상태를 생각해 보세요. (볼테르의 철학 소설 『차디히Zadig』에는 다음의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즉 인간의 삶은 죽음의 결과를 야기하는 과정에 의해서 영위된다고 한다. Hans Blumenberg: Schiffbruch mit Zuschauer, Paradigma einer Daseinsmetapher. Frankfurt a. M. 1979, S. 38. - 역주) 그는 파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끝없이 팔다리를 허우적이며 수영합니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망망대해에 어떠한 해안가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게 되면, 어떨까요? 그의 발버둥이 끝내 죽음으로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면, 수영하는 자의 노력은 그야말로 헛된 것으로 밝혀지게 되었지요.

 

이러한 가장 갈력한 반-유토피아의 정서는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삶의 구원이 불가능하지 않고,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말해야할지 모릅니다. 만약 주어진 현실, 바로 지금의 시점에 어떠한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게 피치 못하고 지금까지 어떠한 역사도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적 진행 과정 속에서 어떠한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러한 유형의 하이데거 식의 “존재” 개념은 존재하지 못할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러한 참혹한 현실이 하나의 시도로 증명해내려는 인간의 노력에 대항하여 모든 가능성을 차단시키게 되면, 현실에 머무는 인간의 의미 자체가 없을 게 분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의 열정에 해당하는 영역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것은 “더 나은 삶에 관한 꿈”, 다시 말해서 유토피아 사회상과 매우 근친하지만, 그럼에도 그것과는 구분됩니다. 사회 유토피아에서는 때로는 자유에 의해서, 때로는 질서에 의해서 영위되는 공동의 삶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이 경우 자유의 개념은 인간 삶에 도움을 주는 최상의 구성 체계 내지는 변수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의 열정은 유토피아에서 출현하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연법의 강력한 의향 속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가령 18세기에 자유주의를 표방하던 사람들이 의연한 기개 내지 의연한 걸음을 내세우며 제기하던 자유에 대한 열망을 생각해 보세요. 이 경우 인간적 품위는 자유에 대한 열정과 접목되어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빌헬름 텔」 그리고 비토리오 알피에리Alfieri의 극작품은 자유를 갈구하는 인간형을 놀라울 정도로 치열하게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형은 독재자에 대항하여 일신의 안일을 도모하지 않은 채 과감하게 자유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자연법의 사상은 바로 이러한 놀라운 기개 속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객관적 현실적 가능성의 공간 속에서 위치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