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bloch 대화

블로흐와 아도르노의 유토피아 논쟁 (2)

필자 (匹子) 2021. 8. 31. 10:13

아도르노: 나 역시 당신의 주장에 부분적으로만 수긍합니다. 당신이 암시한 바 있는 사항을 동원하여 몇 가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일단 여기서 분명히 규정할 게 있어요. 앞에서 과학 기술에 관한 말씀은 유토피아에 관한 나의 본래의 입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과학 기술과 관련된 냉정함 때문에 오늘날 유토피아의 의식이 축소되고 폄하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서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다음과 같은 물음입니다. 즉 과학 기술이 이룩해낸 놀라운 발명이라든가 개별적인 혁신이 전체성, 사회 전체의 문제점을 고려할 때 어떠한 방식으로 하나의 대립각을 형성시키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보세요.

 

유토피아라는 무엇 내지 유토피아라고 생각될 수 있는 무엇은 그 속성에 있어서 사회 전체의 변화를 촉구합니다. 사회 전체의 어떤 그러한 변화에 관한 상상은 이른바 모든 유토피아적으로 이룩해낸 결과물 속에서는 -당신도 잠깐 언급한 바 있듯이- 매우 초라하고, 편협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어쩌면 사회 전체의 변화를 추동하려는 사고는 앞에서 지적한 기술적 혁신이라든가 발명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지요. 내 생각으로는 마치 사회 전체를 생각하고 이를 떠올리는 인간의 주체적인 의식의 능력이 사라진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사회적 전체성의 변화에 관한 물음은 어쩌면 유토피아의 사고와는 전혀 다른 게 아닐까? 하고 여겨집니다.

 

사실 인간은 지금까지 가능성이라는 이러한 차단된 의식으로써 주어진 세계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의향은 어쩌면 어떤 보다 깊은 토대를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러한 토대를 깊이 숙고하고 있지요. 이러한 토대가 어쩌면 당신이 행하려고 하는 유토피아의 근친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명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동의하든, 거부하든 간에- 내면 깊숙이 세상의 변화가 가능하고, 세계가 달리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굶주림 그리고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으며, 자유로운 인간으로 얼마든지 생활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에 이들과는 달리 지구상에는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기관이 스스로 완강한 모습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더 나음 삶의 가능성이 수월하게 포착되고 명명백백한 가능성으로서 눈앞에서 얼마든지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그들의 앞에는 그들의 갈망을 급진적으로 실현시키지 못하게 가로막는 무엇이 버티고 있습니다. 이 무엇은 앞에서 말한 완강하고 경직된 기관, 바로 그것입니다.

 

누군가 아무런 해악이 없는 시대에 교활한 속물에게 남겨진 무엇을 우주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 그것은 유토피아에 불과해”라든가 “그건 오로지 놀고먹는 세상에서 가능할 뿐이야.” “그것은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하네.” 등과 같은 말을 남기곤 하지요.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이 덧붙일 것입니다. 즉 인간은 성취될 수 있는 명백한 가능성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방식으로 성취의 명백한 불가능성 사이의 어떤 모순을 완전히 습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말한다고요. 사람들은 스스로 이러한 불가능성을 스스로 거역할 수 없습니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인간은 어떤 공격성향을 지닌 자와 동일시되기를 거부한다고 말입니다. 그들의 내면적 감정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어쩌면 인간의 내면에는 세상을 사악하게 변화시키려는 욕구가 도사리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크뤼거: 질문을 던지려고 합니다. 블로흐 교수님. 유토피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행복인가요, 아니면 성취인가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단어입니다만, 유토피아의 내용은 자유인가요? 기대하는 바가 도대체 무엇인가요?

 

블로흐: 유토피아는 오래 전부터 오로지 사회적 유토피아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더 나은 삶에 관한 꿈 말입니다. 토머스 모어의 책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상의 국가에 관하여 그리고 새로운 섬 유토피아 De optimo statu rei publicae deque nova insula Utopia』. 최상의 국가는 모어의 경우 하나의 목표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모어는 행복, 사회적 행복을 최대한 가능하게 하는 세계의 변화를 갈구한 셈입니다. 유토피아는 실천적 방향성, 다시 말해서 차 시간표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일련의 유토피아들은 제각기 구체적인 사회 현실에 종속되는 것들입니다. 토머스 모어는 엘리자베스 치하에서, 다시 말해 영국의 제국주의가 시작되는 시기에 살았습니다. 그는 유토피아의 섬사람을 통해서 자유주의의 열정을 강하게 드러내었습니다. 100년 후에 캄파넬라는 에스파냐의 필립 2세에 의해서 지배당하는 식민지인 이탈리아에서 살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소에서 심판당하는 시대에 살면서 (갈릴레이의 재판은 15년에 걸쳐서, 다시 말해 1615/16년에서 1633년까지 로마의 존교재판소에서 거행되었다. - 역주), 이와 반대되는 모델로서의 자유의 정신을 구가하는 『태양의 나라』를 설계했습니다. 언젠가 캄파넬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이는 그 자체 무척 의미심장한 발언이 아닐 수 없어요. “만약 거대한 가능성의 질서가 자리한다면, 모든 게 분명한 추에 의해 정해진다면, 모든 구체적 사회 현실은 그야말로 바르게 질서 잡힐 수 있을 것이다.”

 

모어와 캄파넬라의 경우 백일몽의 나라에서 어떤 목표가 공통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 객관적으로 기초하고 있는, 최소한 꿈속에 토대를 이루고 있는 찬란한 국가의 상이었지요. 그것은 어떤 더 나은 사회적 삶에 관한,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낮꿈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밖에 기술적 유토피아의 사고는 캄파넬라의 경우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에는 더욱더 강하게 부각되고 있지만- 모어의 유토피아와는 약간 대조를 이룹니다. 베이컨의 작품에서 서술되는 “솔로몬의 사원 Templum Salomonis”은 놀랍게도 하나의 완성된 기술 유토피아로서의 대학교를 예견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발명을 위한 학문적 기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솔로몬의 사원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는 모든 자연과학적 발명에 관한 프로그램의 책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와는 달리 어떤 오래된 계층적 장르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를 생략해서는 안 되지만, 통상적으로 논의에서 쉽사리 제외시키곤 하지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동화입니다. 동화는 사회 유토피아의 갈망을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더 나은 삶 그리고 정의로움이 생동감 넘치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밖에 동방의 동화에서는 기술 유토피아 역시 놀라울 정도로 착색되어 있습니다. 『천일야화』의 한 이야기에는 마법의 말 (馬)이 묘사되는데, 여기에는 어떤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빙빙 도는 기구가 서술되고 있습니다. (마법의 말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의 문헌에 실려 있다. 앙투안 갈랑: 천일야화, 임호경 역, 제 6권, 열린책들 2010, 1733 - 1784쪽. - 역주) 말하자면 『천일야화』에서는 기발하게도 헬리콥터 하나가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어요. 우리는 『천일야화』에서 이러한 발명에 관한 수많은 범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프랜시스 베이컨은 동화 속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참고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가령 자신이 생각하는 게 현실적 마술이라고 언급함으로써 동화가 지니고 있는 가상적 특성으로부터 거리감을 취합니다. 물론 현실적 마술은 오래 전의 동화 속의 갈망의 상에 그대로 담겨 있지만, 베이컨 자신이 채택하는 것은 이를테면 알렉산더 대제의 행위일 뿐,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의 가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상태가 어떠한가? 하는 물음에 따라 유토피아의 내용 역시 얼마든지 다양하게 변조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19세기의 유토피아에는 기존하는 사회적 상이 밀접하게 연상될 수 있습니다. 이는 그 자체 분명한 특성입니다. 가령 생시몽과 푸리에에게서 이러한 특성은 가장 명징하게 나타나지요. 푸리에는 당시의 사회를 가장 정확하고도 냉정하게 분석한 사상가였습니다. 1808년에 발표된 그의 글 「네 개의 운동과 보편적 운명에 관한 이론(Théorie des quatre mouvements et des destinées générales)」은 이후에 출현할, 후기 자본주의의 독점 자본의 시스템을 예측해내고 있습니다.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에게서 중요하게 나타나는 것은 변증법의 사고이다. 그는 나중에 소규모의 노동자 공동체를 설계했는데, 이는 당시의 프랑스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점에 대한 대안으로 나타난 것이다. 박설호: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제 3권, 울력 2021, 219쪽을 참고하라. - 역주) 이러한 면에 있어서 푸리에는 부정적 유토피아를 선취하고 잇다고 말할 수 있어요. 생시몽과 푸리에의 경우 유토피아의 내용은 이전과는 다르지만, 그 방향성에 있어서는 커다란 변화가 없습니다. 심리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들 역시 더 나은 국가를 내심 동경하고 있습니다. 유토피아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그들이 설계한 유토피아 속에는 그들이 갈구한 바가 그대로 가상적으로 반영되어 있지요. 말하자면 무언가를 동경하고 갈구하는 태도는 모든 인간에게 발견되는 일반적인 특성인데, 이는 유일하게 진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날카로운 질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최상의 무엇으로서 과연 무엇을 동경하는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보세요.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유토피아의 주 영역이었던 국가소설, 다시 말해서 사회 유토피아에서 벗어나서, 당신이 언급한 바 있듯이 전체성 때문에 유토피아의 다른 영역, 즉 과학 기술을 예의 주시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설계된 바 없으며, 축조된 적이 없는 어떤 건축물을 생각해 보세요.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면모를 지닌, 놀라운 갈망의 건물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마분지에 그려진 극장의 건물을 유추해 보세요. 그것은 값싸고, 비용이 적게 들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돈이 없었으며, 기술 역시 충분히 성숙되지 못했습니다. 바로크 시대에 빈 사람들은 찬란한 아름다움을 지닌 극장 건물을 축조했지요. 갈망의 건축물은 마분지와 건축가의 상상 속에 자리했지만, 그럼에도 당시에 크고 작은 그럴 듯한 건축물이 축성되었습니다.

 

그밖에 우리는 의학의 영역에서도 유토피아의 범례를 접할 수 있어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죽지 않을까? 하고 심도 있게 고민해 왔습니다. 이러한 갈망은 일견 어리석게 보이는 먼 목표로 생각됩니다. 그렇기에 의학자들은 이보다는 경미한 그럴듯한 갈망을 실천에 옮기려고 했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어떻게 하면 통증을 완화시키고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 문제는 마취 기술을 발명함으로써 쉽게 극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의학자들은 질병을 완전히 치유할 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기술 역시 확보하게 됩니다. 즉 병자가 수술을 통해서 이전보다 더 건강한 육체를 지니게 되는 기술 말입니다. 이는 마치 국가의 체제를 변화시키듯이, 인간의 신체 조직을 개조함으로써 가능하게 됩니다.

 

그밖에도 서두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종교 영역에서도 유토피아의 특성은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에 출현하는 천국의 국가를 가리킵니다. 마지막 시점에 메시아, 즉 그리스도가 출현하여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다는 것을 선포하게 되는 상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멀리 떨어진 갈망의 상인데, 여기에는 기상천외한 내용과 엄청난 깊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학적 영역의 갈망의 상 속에는 사회 유토피아와 같은 막강한 상이 엿보이고, 이를 추동하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유형의 갈망의 상들에 관해서 토론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실현 가능한 어떤 기존하는 전제조건이라는 척도에 따라서 말이지요. 과연 종교적 갈망의 상이 하나의 장소 속에서 그리고 객관적 현실적 가능성이라는 유형 속에서 구체적으로 정립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 또한 중요합니다. 가능성이란 지금까지 마치 주어온 지식처럼 그런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다루어졌으며, 함부로 취급되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