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bloch 대화

블로흐와 아도르노의 유토피아 논쟁 (1)

필자 (匹子) 2021. 8. 29. 10:25

인터뷰는 1964년에 이루어졌다. 참석자는 문화 저널리스트이자 독일 작가인 호르스트 크뤼거 (Horst Krüger, 1919 - 1999), 테오도르 아도르노 (Theodor Adorno, 1903 - 1969) 그리고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 1885 - 1977)이다. 본 원고는 1964년 5월 6일 바덴바덴 지역에서 남서부 라디오 방송으로 알려진 바 있다. 출전: Rainer Traub u.a. (hrsg.): Gespräche mit Ernst Bloch, Edition Suhrkamp: Frankfurt a. M. 1980. S. 58 - 77.

 

....................................................

 

크뤼거: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오늘날 그렇게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대체로 가치 하락된 단어이며, 일상생활에서 “이상주의적”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곤 합니다. 우리의 주제는 유토피아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시의적절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도르노: 내가 먼저 말씀드리지요. 당신의 말씀대로 유토피아의 논의는 어쩌면 합법적이지도 않고 적절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나의 친구인 에른스트 블로흐가 자신의 초기 저서 『유토피아의 정신』에서 유토피아의 개념에 관해서 충분하게 설명했으며, 그것으로 의미 부여를 마쳤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선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한 번 환기시키고 싶습니다. 즉 이른바 수많은 유토피아의 꿈들은 오늘날 TV에서 자세하게 방영되고 있으며, 이전에 생각되던 수많은 가능성들이 우리 앞에서 실현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꿈 내지 가능성들은 마치 다른 행성에서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 것처럼 착각을 느껴지지요. 그런데 이러한 유토피아의 수많은 갈망들은 무언가를 성취하는 과정에서 어떤 가장 좋은 것을 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래야 지울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갈망의 성취를 대하는 것은 결코 우리에게 결코 어떤 즐거움을 안겨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갈망과 꿈들은 실현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다음과 같은 특성을 도출해내는 것 같아 보입니다. 즉 미몽에서 깨어난 것과 같은 냉담함, 실증주의의 정신 그리고 그밖에 지루한 권태 등과 같은 특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갈망과 꿈은 내 생각에 의하면 주어진 현실에 실재하는 것과는 달리 엄청난 양으로 생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끝없는 가능성이라든가 어떠한 제한도 용인하지 않는 무엇 등을 무조건 찬양하고 추종하는 태도는 어쩌면 잘못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는 오히려 확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무엇을 더욱 중시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인간으 갈구하는 갈망이 부분적으로 성취된다고 해서 꿈과 갈망 속의 모든 가상적인 내용이 처음부터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갈망의 허구성을 조롱하는 다음과 같은 동화를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 농부에게 세 가지 소원을 말해보라고 요구합니다. 첫 번째로 택한 농부의 갈망은 자신의 배고픈 아내에게 소시지 한 개를 선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두 번째 갈망은 이 소시지를 아내의 코앞에서 순간적으로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농부의 세 가지 소원은 그야말로 헛된 것이나 다름이 없지요.

 

예컨대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내적인 갈망이라든가 에로틱한 유토피아의 상을 떠올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TV를 통해서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어요. 사람들은 기껏해야 어떤 아름다운 여가수를 바라보고 몹시 흥겨워하지요. 이 경우 여가수는 자신의 진면목을 그대로 드러내는 게 아니라, 그다지 깊은 뜻을 담지 않은 노래를 부르면서 포즈를 취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킵니다. 이러한 여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는 “장미”, “달밤” 등과 같은 사랑의 언어가 조화롭게 뒤섞인, 커다란 의미 없는 것들이지요.

 

그밖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사람들은 유토피아가 일반적으로 언제나 동일한 오늘의 반복되는 순간 속에서 선취되었다고 통상적으로 생각한다고 말이지요. 언젠가 동화 작가, 빌헬름 부쉬Wilhelm Busch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곳 또한 아마 아름다울 거야. 허나 나는 지금 어차피 여기 있어.” (인용 시구는 빌헬름 부쉬가 1882년에 발표한 그림책에 실린 시, 「플리시 그리고 플룸 Plisch und Plum」의 한 구절이다. “어느 지역으로 여행하여/ 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막강하게/ 손 안에는 놀라운 전망이 자리하고 있지/ 피스터라는 남자가 다가와서/ 왜 떠나지 않고 먼 곳을/ 우두커니 바라보는가? 하고 말했다./ 다른 곳 또한 정말 아름답겠지만/ 나는 어차피 이곳에 머물고 있어.” 플리시와 플룸은 두 마리 개인데, 카스파르 슐리히에 의해 익사의 위기에 처한다. 이때 두 소년, 파울과 페터는 두 마리의 개를 구출하여 집으로 데리고 간다. 두 마리의 개는 나중에 슐리히에게 대담한 복수의 계획을 세운다. 부쉬의 그림책은 다음의 문헌에 실려 있다. Wilhelm Busch: Werke. Historisch-kritische Gesamtausgabe, Bd. 4, Hamburg 1959, S. 508. - 역주) 그런데 이러한 시구는 과학 기술의 유토피아가 성취된 순간에는 어떤 참으로 끔찍한 의미를 전해줄 수 있어요. 즉 “나는 지금 어차피 여기에 있어.”라는 체념을 생각해 보세요. 부쉬의 시구에 등장하는 놀라운 주인공 미스터 피프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찬란하게 전개되리라는 거대한 전망을 품은 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크뤼거: 블로흐씨, 당신도 유토피아의 개념이 오늘날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어떻게 표현할까요?- 기술적 세계의 완전무결함과 관련이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블로흐: 그에 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습니다. 긍정적인 대답과 부정적인 대답은 서로 관련되지요. 한편으로는 과학 기술이 참으로 놀라운 정도로 완전무결하게 보이지만, 그게 완전무결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다만 아주 제한된 영역으로서의 갈망의 꿈을 건드리고 있지요. 여기서 우리는 하늘을 나는 오래된 꿈을 첨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기억으로는 리하르트 데멜의 시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지요. “마치 새처럼 자유롭기 위해서 우리에게 결핍된 것은 자그마한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오로지 시간. Uns fehlt nur eine Kleinigkeit, um so frei zu sein wie die Vögel sind: Nur Zeit.” ( 이 시구는 리하르트 데멜이 1896년에 완성한 시 「일하는 남자Der Arbeitsmann」에 있다. 첫 번째 연은 다음과 같다. “우리에겐 침대도 있고, 아이도 있어/ 우리는 둘이서 얼마든지 일할 수 있어/ 태양과 비 그리고 바람이 있으니/ 우리에겐 새처럼 자유롭기 위한/ 어떤 작은 게 결핍되어 있어/ 시간 말이야.” - 역주)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성취되지 않은 갈망의 잔여물들이 수없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그게 성취되었을 경우 이에 대한 실망감 또한 자리하고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음의 사항을 간과하기 일쑤입니다. 즉 모든 실현은 그 자체 당사자의 마음속에 어떤 기이한 우울의 감정을 남긴다는 사항 말입니다. 그게 성취의 우울이지요. 그렇기에 실현은 아직 실제로 드러나지 않았으며, 잔여물 없이는 생각할 수도 그리고 계속 요청될 수도 없어요. 그렇지만 유토피아의 가치가 하락된다고 해서 이것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된 슬로건인 “그건 오로지 유토피아에 불과해.”라는 말을 생각해 보세요, 여기서 유토피아는 환상 누각 내지는 뜬금없는 희망 사항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처음부터 실행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 않아요, 이를테면 천박한 의미에서 무언가에 열광하는 자세라든가 몽환적 태도를 고려해 보세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유토피아를 이런 식으로 폄훼해 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토피아에 대한 비난은 현대 사회에만 존재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유토피아에 대한 비난이 어째서 현대에 이르러 유독 심하게 행해졌는지에 관해서는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만 유토피아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출현한 것은 아니지요. 흔히 현대 과학은 놀랍게도 사이언스 픽션을 거론하곤 합니다. 나아가 신학 영역에서도 동화에 해당하는 “오래된 방앗간에 흐르는 물”을 언급하지요 이러한 언급 속에는 내가 다룬 바 있는 “희망의 원리”가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잇습니다. 말하자면 무언가를 소망하는 식으로 “만약 그게 그렇다면” 등의 방식으로 시작하는 경우를 고려해보세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현실은 결코 소망하는 경우와 같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그것은 더 이상 유토피아적이라고 명명되지는 않지만, 그게 명명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은근히 오래된 사회 유토피아를 유추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확신합니다. 갈망하는 내용에 아주 가까이, 혹은 아주 멀리 다가가면, 우리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의 어떤 유형에 매우 근접해 있다고 말입니다. 유토피아는 토머스 모어에 의하면 처음부터 하나의 장소를 지칭하는 표현이었습니다. 모어는 이상적인 공간을 머나먼 남쪽 대양에 위치한 하나의 섬으로 설정하였지요. 그러나 유토피아의 이러한 장소의 특성은 나중에 시간의 특성으로 변화되었습니다. 18세기 그리고 19세기의 이상주의자들, 이를테면 푸리에와 생시몽은 자신이 갈구하는 나라를 먼 미래의 시점으로 이전시켜 놓았습니다. 말하자면 유토피아의 유형이 장소적 특성에서 시간적 특성으로 뒤바뀌게 된 것입니다. 토머스 모어의 경우 갈망의 나라는 그 자체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먼 곳에 위치한 섬이지만, 사람들은 정작 그 곳으로 직접 가보지 못했지요.

 

만약 바람직한 나라가 미래로 이전된다면, 그 땅은 내가 가보지 못한 장소일 뿐 아니라,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됩니다. 말하자면 이상적인 섬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렇지만 미래에 도래할 최상의 사회를 갈구한다는 것은 허튼 생각 내지는 뜬금없는 열광의 태도가 아니라, 최상의 사회가 아직 없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만약 우리가 무언가를 시도한다면, 최상의 행복한 사회는 실현 가능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곳으로 향하는 게 아니라,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려고 노력함으로써 유토피아의 섬은 가능성이라는 정태적인 바다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때 유토피아는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내용을 획득하게 되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유토피아는 의식 속에서 아직 보상받지 않은 무엇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물론 유토피아가 오늘날 그렇게 천박한 사고라고 매도되고, 본연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고 비난당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나의 친구, 아도르노는 유토피아의 본연의 임무가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의는 부분적인 사항에 국한될 뿐입니다. 아도르노는 유토피아의 의향이 오늘날 완전히 충족되어 있으며, 서구의 현대 사회에서 계급 문제가 극복되었다고 은근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적대적인 계급 사이의 갈등이 사라졌기 때문에 유토피아의 사고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