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학 이론

박설호: (3) 김상일의 "腦의 충돌과 文明의 충돌"

필자 (匹子) 2023. 4. 11. 09:45

(앞에서 계속됩니다.)

 

7. 문화적 침범과 서구화 그리고 이와는 다른 홍산 문화: 서양의 이원론의 대립은 좌뇌와 우뇌의 균열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대립은 앞에서 언급한 여성 살해에 관한 서양의 신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구의 기독교 국가들은 기독교를 비서구 국가에 전파하고, 이들이 서구화하기를 희구하였다. 그들의 3 M 정책은 “선교Mission”, “상인Merchant” 그리고 “군대Military” 등을 동원하는 일이었다.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를 잠식하고 파괴하는 것은 신화에서 선취되고 있다. 문명사의 대서사시는 동양과 서양 사람들의 충돌과 갈등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가령 우랄알타이어 산맥에 거주하던 수메르 인들은 메소포타미아로 이전하여 서양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10세기의 칭기즈칸은 서양을 정벌하였고, 19세기부터 시작된 서세동점 (西勢東漸)의 역사는 충돌과 갈등을 말해준다.

 

충돌과 갈등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여성 착취 내지 여성 살해의 역사를 심화시켰다.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고대 인도에서 여성 신은 남성 신에 의해서 무차별하게 살해당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홍산 문화 이후의 한반도에서는 충돌과 갈등이 아니라, 문화적 화해와 아우르는 양상을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예컨대 단군 신화에서 이러한 폭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남성신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의 대모 웅녀와 결혼한다. 이는 고대 한국의 문화가 균열이 아니라, 어떤 화합 내지 조화를 실천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두 개의 이질적인 특성은 서로 대립하고 투쟁하며 살해하는 대신에 마치 음과 양처럼 서로 아우르고 있다. 이는 어둠과 태양의 상호 만남으로 비유될 수 있다. 환웅이 밝음 (白)을 상징한다면, 웅녀는 어둠 (黒)을 대변한다. 곰이라는 말은 “검음” 내지 “어둠”을 지칭한다. 일본에서 신의 이름은 “가미 かみ”인데, 이는 한국말 “곰”에서 비롯한 것이다.

 

8. 음양의 아우르기로서의 씨름 그리고 단군 신화 속의 조화로움: 외국 문물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일본과 중국은 화혼양재 (和魂洋才), 중체서용 (中体西用) 등을 외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것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서양 문물의 수용은 중국과 일본의 경우 토착 문물의 상실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수운 최제우는 포함삼교의 연장선상에서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 장점을 체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가 바라는 후천개벽은 포함 삼교 (包含三教) 그리고 기독교의 인격신의 바탕 하의 후천개벽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이러한 노력을 방해하자, 수운의 전투적 비판의 칼날은 일본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음양의 아우르기와 단군 신화의 조화로움은 “각저총의 씨름도”에서 나타난다. 고대 한국의 전통적 무술은 주지하다시피 씨름이다. 씨름은 상대방을 죽이고 무찌르는 게 아니라, 힘 겨루는 일에서 시작하여 힘 겨루는 일로 끝이 난다. 고구려 “각저총의 씨름도”에서는 신단수 나무 아래에서 두 남자의 씨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곁에는 곰과 호랑이가 드러누워 이를 관망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한쪽 남자가 매부리코를 지닌 서역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단군 신화를 떠올리며 곰과 호랑이가 굴속에서 사람이 되려고 서로 경쟁하는 것을 씨름으로 묘사한 게 아닐까?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살해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서로 힘을 겨루는 일이야 말로 바람직한 인간의 행동이 아닐까? 씨름은 서로 떨어져서 경기하는 레슬링과는 달리 한 순간도 상대방과 떨어질 수 없다. 이는 외인적이 아니라, 내인적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씨름에는 다른 사람의 힘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쓰러뜨리는 기술이 많다. 이로써 씨름의 관계는 충돌과 투쟁이 아니라, 음양의 아우르기로 상징화될 수 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