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명시 소개) 김광규: 물오리

필자 (匹子) 2021. 6. 21. 15:03

수직이 아니면서도

가장 곧게 자라는 나무

전기를 일으키지 않는

그 위안의 나뭇가지에

결코 앉지 않는

거룩한 새

오리는 눕거나 일어서지 않는다

겨울 강 물 위를 부드럽게 떠돌며

단순한 몸짓 되풀이할 뿐

복잡한 아무 관습도 익히지 않는다

눈 덮인 얼음 속에 가끔

물의 발자국 남기고

지진이 나면 돌개바람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며

죽음의 땅 위에 화석이 될

마지막 그림자 던지는

완벽한 새

오리가 날아왔다가

되돌아가는 곳

그곳으로부터 나는 너무 멀어졌다

기차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고

비행기로 바다를 건너

나는 아무래도 너무 멀리 와

이제는 아득한 지평을 넘어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무심하게 날개치며 돌아가는

오리는 얼마나 행복하랴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는

애써 배운 모든 언어를

괴롭게 신음하며 잊어야 한다

얻을 때보다 훨씬 힘들게

모든 지식을 하나씩 잃어야 한다

일어서도 또 일어서고 싶고

누워도 또 눕고 싶은

안타까운 몸부림도 헛되이

마침내는 혼자서 떠나야 할 것이다

날다가 죽어 털썩 떨어지는

오리는 얼마나 부러운 삶이랴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곳

그 먼 곳을 유유히 넘나드는

축복받은 새

나는 때때로 오리가 되고 싶다.

 

김광규: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학과 지성사 1995, 48 - 50쪽.

 

조만간 해설을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