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Bloch 흔적들

블로흐: 놀라움

필자 (匹子) 2021. 2. 5. 09:14

“생각해 보세요, 나는 가끔 푸른빛을 발하는 파리 한 마리를 바라봅니다. 네,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말처럼 들리겠지요. 어쩌면 내 말이 이해될지 모르겠어요.” - “웬걸요, 잘 이해합니다.” - “네, 네. 이따금 나는 풀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러면 풀 역시 나를 바라볼 수도 있어요, 우리가 대체 무엇을 알고 있을까요? 풀줄기 하나를 골똘히 바라봅니다. 놈은 가볍게 몸을 떨고 있어요 이 순간 그것은 어떤 무엇이라고 생각되지요. 내 곁의 무엇을 생각합니다. 여기 풀줄기 하나가 서서 몸을 떨고 있다고요! 내가 바라보는 것은 가문비나무일 수 있어요. 나무는 가지 하나를 지니고 있지요. 나무 가지는 나로 하여금 무언가 생각하게 하지요. 그렇지만 산정에서 사람들도 바라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마치...” - “네, 네.”하고 그미는 말한 다음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가 오네요.” 하고 나는 말했다. “네, 비 내리는 것만 생각하세요.”하고 그미는 말한 뒤에 이미 자리를 떠났다. - 크누트 함순: 『판』

 

(크누트 함순의 『판』은 1894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노르웨이 군대의 중위 글란은 전역한 다음에 외롭게 살아가는 인물인데, 자연을 열광적으로 찬양하지만, 왜곡된 성격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 불화를 겪는다. 작가는 특히 여성들과의 사랑에서 삶의 위기를 체험하는 외톨이 인간형의 심리구조를 탁월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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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비 내리는 것만 생각하세요. 이렇게 느끼는 여자는 일순 깜짝 놀라면서 뒤로 사라지고 만다. 아니, 어쩌면 그미의 상상은 앞서나가는지도 모른다. 그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별로 많지 않다. 그럼에도 그미는 모든 질문의 근원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우리는 젊은 시절에는 마음이 공허했지만, 그래도 순수했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걷기도 했다. 때로는 가만히 서 있기도 했고, 돌아와 잠들다가 다시 깨어나기도 했다. 둔탁한 분위기 속에서 항상 같은 일만 반복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얼마나 비밀스러운가? “존재”의 힘은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막강한가? 하기야 이러한 공식 자체가 너무 많은 것을 내포하는지 모른다. 어쩌면 존재 근처에 어떤 기괴한 무엇이 자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에는 결코 하찮게 여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을 비밀스러운 수수께끼로 치부하고 이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는 것이다. 존재의 막강함을 담을 수 있는 적절한 느낌의 말은 없다. 그게 아니라면, 사람들은 첫 번째 놀라움을 그저 회피할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후의 시점에 하찮은 내용을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포착하여, 보다 예리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비록 피상적이지만, 집요하게 파고든 무엇이다. 가령 우리는 어째서 하나의 꽃이 찬란하게 만개하는지 잘 안다고 여길 수 있다. 무언가를 충족시키지 못한 사람은 예언자를 찾아가서, 꽃을 피울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요정에 관하여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도 있다.

 

질문하는 자의 궁금증 내지 아무런 토대 없는 놀라움을 그야말로 싫증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학문이다. 학문은 이것저것이 과연 어떻게 탄생했는지, 이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저것이 되었는지 논리적으로 “해명”해주고 있다. 뒤이어 학문은 “이 다음에 그리고 이 때문에 post hoc et propter hoc”와 같은 표현을 섞어가면서, 논리의 차원에서 추상적인 달리기를 계속 진행할 뿐이다.

 

존재의 모든 사항에 관해서 응급조처의 방식을 활용하여 대충 설명을 끝내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신지학을 신봉하는 자들인데, 요정 외에도 대천사와 같은 자들에 관해 해명하기도 한다. 흔히 말하기를 대천사는 이른바 이 세상에 명명되는 모든 사물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천사의 흔들리는 시작을 알리는 아침 여명에서 드러나는 것은 기껏해야 어떤 숙명론적 신비주의라는 낯선 호텔에서 떠먹는 스프밖에 없다.

 

일단 요정이라든가 대천사 등과 같은 가설적 존재 내지 마음 내키지 않는 가상적 존재를 용인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과는 전혀 다른 유형일까? 어째서 그들은 현존하는 존재의 상부에서 그냥 서성거린다고 함부로 단언할 수 있을까? 만약 그들이 풀줄기라든가, 가문비나무의 가지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째서 그들 주위의 분위기는 그렇게 어둡고 불명료한가?

 

어째서 나뭇가지는 예나 지금에나 간에 정확한 이름을 간직하지 않은 채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유추하게 하는가? 마치 우리가 그것을 결코 명명할 수 없는 “모든 무엇”의 부분이라고 이해하는 식으로 말이다. 나뭇가지는 자신의 존재와 함께 그렇게 어설프게 무 (無)를 싸안고 있는가? 나뭇가지가 마치 자신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실제 존재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처럼 우리에게 이중적으로 낯설게 비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게 아니라면 단순한 놀라움이라는 질문은 주어진 사물 속에 자신의 우주가 발견될 수 있다는 갈망을 통해서 무 (無)의 영역마저 포괄하고 해명할 수 있을까? 분명히 말하지만 세계의 토대는 그렇게 확정되어 있지 않고 어둡기만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속적인 자극을 필요로 하는지 모른다. 나아가 우리는 모든 것이 다르게 존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더 이상 질문을 필요로 하지 않고, 질문 자체가 하나의 놀라움 속에서 완전한 무엇을 표현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이 경우 질문 자체가 하나의 행복과 같은 존재를 대변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이 경우에 있어서 올바른 지식, 혹은 심령학적 지식보다도 더 정확한 특징을 전해준 바 있다. 놀라움은 플라톤 이래로 철학자들에게 하나의 확정된 사항, 혹은 어떤 시작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자들이 이른바 시작이 가리키는 이정표를 고수했는가? 어느 누구도 첫 번째 해답이 떠오르는 순간 지속적으로 어떤 질문하는 놀라움에 관해서 더 이상 숙고해나가지는 않았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놀라움 근처에서 구체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문제점들을 수미일관 측정한 적이 없었다. 놀라움이 어떤 경우에 차단되는가? 라든가 놀라움이 어떻게 변화되는가? 등의 문제를 집요하게 추적한 철학자는 지금까지 없었던 것이다.

 

기실 놀라움 속에는 질문만 자리하는 게 아니라, 어떤 대답의 언어가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어려웠다. 놀라움은 이른바 “자기 놀라움”이라는 소리를 함께 드러낸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놀라움”은 사물 속에서 발효하는 마지막의 상태를 경청하게 될 때 표출되는 무엇이 아닌가? 어쨌든 놀라움으로 시작되는 사고는 철학적으로 완전히 배출되어 종결되지 말았어야 옳았다. 놀라움은 철학의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의미심장하게 울려 퍼질 수 있다. 이는 세계를 해명하는 단순한 계산 기구들로부터 형이상학자를 구분시키는 무엇이 아닐 수 없다.

 

놀라움의 사고는 철학을 항상 다시 청춘과 연결시키게 한다. 이로써 그것은 모든 점에 자리하는 형이상학을 다시금 불안하게 하고, 믿을만하게 만든다. 나이든 사람의 지혜는 17세의 청년이 느끼는, 꾸밈없는 신선함으로 가득 찬 원초적 놀라움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처녀와 사내 사이의 몇 마디 일시적으로 주고받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이따금 그것을 말하자면 아침에 느끼는 본능의 유형으로 여기며 명상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의 수많은 거대한 수수께끼들은 어떤 내면의 깊숙이 자리한 비밀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