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히 잘 지내니? 하고 우리는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인사하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다. 사람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모든 게 잘 진척되리라고 지레짐작하는 것 자체가 놀랍지 않은가? 이에 대한 대답은 미리 정해져 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잘 지내는 것 외의 다른 대답을 듣고 싶지 않은지 모른다. (...)
오래된 소도시에서 저녁식사 시간에 포도주 한 잔을 마신다. 식당 밖에는 시장터가 보인다. 광장 주위에는 얼룩덜룩하고 각이 진 건물들이 멋지게 둘러싸여 있다. 바로 이 순간 건물의 발코니 그리고 돌출된 창에서 행복의 근원을 전해주는 빛 그리고 음이 은은히 퍼져 나온다. 이러한 빛과 음은 그야말로 내면의 꿈처럼 평화로움을 조용히 알려주고 있다. 행복하고 안온한 분위기는 마치 주위의 건물에서 저절로 퍼져 나오는 것 같다.
바로 이 순간 식당주인은 손님들에게 기이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쪽 건물 위에는 어느 여인이 네 명의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어요. 남편은 함께 사는 데 고통을 느끼고 가출하고 말았지요. 맨 오른쪽 모퉁이의 초록 상점의 건물에는 재단사, 빌헬름이 거주하고 있어요. 그는 도시에서 잘 알아주는 끝내주는 술꾼이랍니다. 빌헬름이 밤에 귀가하지 않으면, 그의 아내는 모든 술집을 돌아다니면서 남편을 찾지요. 빌헬름이 그날 밤 야간 술집을 방문한 적이 없었는데도, 그의 아내는 술집을 뒤졌습니다. 결국 그미는 혼자 지친 몸을 이끌고 귀가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겉옷과 스카프를 장롱에 걸어두었습니다. 그런데 장롱의 옷 사이에서 남편이 죽은 채 발견된 게 아니겠습니까? 경찰 조사에 의하면 사망시간은 아마 그날 오후 무렵이라고 했습니다. - 저기 창문이 돌출된 집이 보이지요? 건물 내부에는 아직도 정육점 가게가 영업중이지요. 오래 전의 일인데 정육점 주인인 빌커는 더 이상 그곳에서 거주하지 않아요. 자신의 사위인 사기꾼이 재산을 몽땅 털어가 날려버렸거든요. 이제 내 마누라는 더 이상 그곳으로 가서 고기를 가져오라고 심부름당하지 않게 되었어요. 아내는 이곳에서 자란 여자랍니다. 아내가 어렸을 때, 그미는 아침 무렵에 부모님의 심부름 차 그곳으로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정육점 건물의 계단에는 언제나 핏자국이 떨어져 있었다고 했지요. 정육점 주인인 빌커는 가게의 테이블 도마 위에 벌렁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푸주 칼로 자신의 목을 자른 것이었지요.”
식당주인은 끔찍한 이야기를 끝냈다. 바로 이 순간 창문은 흐릿한 빛을 반사했으나. 우리에게 결코 안온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오래된 소도시의 광장은 끔찍한 이야기로 인해서 식객들의 마음속에 약간 섬뜩함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식당 주인의 이야기는 모두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불행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슬프고도 끔찍한 이야기 속에는 의외로 아름답고도 전원적인 분위기가 묘하게 담겨 있었다. “좋은 행동은 집안에 그대로 머물지만, 나쁜 짓거리는 엄청난 범위로 퍼져나가지요.” 하고 식당주인은 덧붙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혼란스럽고 모순적이라는 의미였다. 실제로 부정적인 이야기는 초록색의 가게 그리고 행운을 가져다두는 튀어나온 창문의 건물로 향했으나,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소도시 간물들의 정면과 소도시의 실제 현실은 그야말로 서로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꿈속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광장에서 사람들은 이 두 가지 모두를 사진에 담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
언젠가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여행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마력을 아주 주관주의의 관점에서 “시각의 행복”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여행자는 철학자에 의하면 끔찍한 과거의 물품을 매우 성스럽게 바라보곤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가장 아름다운 곳의 모든 사물을 접하려 할 뿐 아니라, 나아가 그곳에 오래 머물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여행자가 아름다운 공간을 접하게 되면, 계속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라, 아예 그곳에 털썩 주저앉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행복은 마치 바로 그곳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를 유혹한다. 이 경우 행복은 마치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객관적 전선 가까이 실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자신에게 낯선 불행을 접하는 것은 결코 성스럽다고 말할 수 없다.
여행자는 건물의 한 부분에 해당하는 정면만을 대하면서,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고통스럽고 불행한 측면을 간과하곤 한다. 하나의 현상은 자신의 심리적 감정 속에서 달리 인지된다. 다시 말해 여행자는 자신의 감정에 의존해 있기 때문에, 마치 객관적인 관찰자처럼 객체 속에 도사린 근본적인 무엇을 냉정하게 고찰하지 못한다. 물론 관찰자가 열광적인 감정을 품으면서 그곳에 서성거리는 것은 사실이다. (열광하면 할수록, 그는 여행 장소에서 비치는 상에 대해 더욱더 무한정하게 반응하게 될 것이다. 설령 관찰자가 대하는 상이 부정적이고 음험하다 하더라도, 이러한 특성은 단순한 여행의 분위기에 의해 은폐되고, 달리 치장되어 사라지고 만다.)
여행에서 접하게 되는 사물 가운데 특히 건물의 정면은 나쁜 특성을 은폐시킨 무엇으로 비친다. 말하자면 여행 시에 처음 새롭게 접하는 건물의 정면은 여행자의 감정이 이입되는 도구 내지는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밖에 멀리 보이는 수평선은 객관적으로 그 위에 자리하는 하늘의 거울처럼 비칠 뿐이다. 바다 속 깊은 부분은 여행자에게 별반 의식되지는 않는다. 호수는 여행자의 눈에는 마치 미소 짓는 것처럼 비치지만, 호수 속의 곤들매기는 잉어를 물어뜯고 있다. 그렇기에 여행자로서 편안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없는 잉어의 삶을 헤아리기는 참으로 어려운 법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과연 어떠한 이유에서 몇몇 사물 가운데 특히 좋은 면만 찬란하게 빛나는가? 정취 넘치는, 번쩍번쩍 빛나는 상이 여행자를 유혹한다. 그렇지만 위험한 상은 그렇지 않다. 몇몇 장면은 우리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음을 말해준다. 여행자들이 접하는 상은 놀랍게도 실제 사물과는 동떨어져 있다. 마치 건물의 정면이 여행자가 떠올리는 찬란한 상을 확인시키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실제로 여행자는 찬란한 건물의 정면을 대하면서 어떤 정중하고도 추상적인 상을 바라보게 된다. 물론 이러한 상은 선한 의지와 관련되는 것으로서, 그 자체 거짓된 무엇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런데 실제 상보다도 여행자들이 직접 대하는 양탄자가 더 휘황찬란하게 보일 수 있으며, 가옥보다는 마음속에 비친 가옥의 상이, 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보다도 집 자체가 더 멋있게 보이는 법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이유에서 여행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발 디디는 양탄자를 바라보고 찬탄을 터뜨리며, 멋진 건물의 정면을 쳐다보면서 격찬을 아끼지 않는 것일까?
이러한 선입견이야 말로 어쩌면 갈망의 속임수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자면 식욕을 부추기는, 뜨거운 알코올음료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여행자들은 이로 인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행의 찬란한 광채를 만끽하지 못하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은 세상을 더욱 인간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주어진 세계는 여행자들이 느끼는 것만큼 질서 잡혀 있지도 않다. 세계의 존재 역시 세계에 관한 사고와 완전히 일치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실제로 에밀 쿠에가 생각한 건강에 관한 사고도 이러한 특성을 고수란히 반영하고 있다. 쿠에는 세상은 우울한 존재이며, 천상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미소 짓게 만든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바로 이 장에서 우리가 서술한 것은 다름 아니라 사물을 체험할 때 우리가 느끼는 통상적인 감정이다. 이것은 학문 이전에 느끼는 인간의 본능적 감정을 가리키는데, 어쩌면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의 현상학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듯하다. 벌겋게 달아오른 불꽃은 의심스러움을 부추기며, 나무를 대할 때 우리는 슬픔을 감지한다. 기계는 우리에게 암울함을 전해주고, 친구의 집은 우리의 마음속에 조화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낮에 바라본 기이한 집은 우리를 섬뜩하게 만들고, 신드바드의 비유적인 이야기에 우리는 순식간에 현혹되곤 한다. 이렇듯 여행자는 여행지에 도착하여 맨 처음 툭 튀어나온 창문을 지닌, 멋진 가옥을 바라본다. 건물은 온통 혼합된 빛을 발하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뒤섞인 인간적 태도와 자세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혼합된 빛은 참으로 비밀스럽다. 물론 여기에는 과학 기술이 개입하는 빛의 근원은 도외시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밀스러운 빛은 좁은 의미에서 고찰할 때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리킨다.
흔히 사람들은 상이란 인간이 애써 간직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때로는 우리를 거의 마력적으로 유혹하여 공허하게 만드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상은 사물의 입장에서 고찰할 때 제반 사물 속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이른바 “건강하게 잘 지내는tout va bien” 경향성을 은밀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경향성은 어떤 혼란스럽게 이를 데 없는 여행을 기약해주는 가능한 갈망을 은근히 내재하고 있다. 예컨대 건물의 앞부분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웅장함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건물의 돌출된 창문의 모습은 얼마나 멋진가? 그렇지만 이러한 광채는 자세히 고찰할 때 마치 정육점의 도마와 같은 딱딱한 소재와 뒤섞여 있다. 여기서도 드러나듯이, 세상은 이러한 아름다운 건물의 정면을 보여줄 때 4월의 변덕스러운 날씨를 활용하는 것 같다.
모든 사물 속에는 찬란한 태양 빛이 자리하고 있지만, 음습한 물의 기운 역시 담겨 있는 것이다. 낯선 여행객은 아무런 위험을 감지하지 않은 채 선한 마음에서 무언가를 갈구하면서 찬란한 빛만 바라보려고 한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밝은 상이지만, 이 역시 존재의 일부이긴 하다. “건강하게 잘 지내니?”하고 상호 인사를 건넬 때, 사람들은 상대방의 상황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바라는 마음만을 표시할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중요하게 인지되는 상 역시 얼마든지 거짓된 친절 내지 경박한 어리석음을 내포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광장의 건물들을 바라보는 여행객들에게는 장인을 등쳐먹는 사기꾼 사위라든가, 정육점 주인의 자살 등과 같은 끔찍한 이야기는 전혀 중요하게 의식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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