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제목은 은폐의 모티프 Motive der Verborgenheit인데, 약간 변형 시켰습니다. (필자)
.................
이야기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타난 전쟁, 다시 말해 북아메리카의 영국군과 프랑스의 비호를 받는 푸른색 군복의 반군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소매상인 한 사람은 푸른 색 군복의 반군과 함께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물건을 싸게 팔고, 농담을 잘 해서 군인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소매상인 버치가 모습을 드러내는 곳에는 언제나 사건이 발생하곤 하였다. 영국 군인들이 푸른색 군복의 반군의 가장 약한 부분을 치고 들어왔는데, 그곳에는 언제나 소매상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푸른색 군복의 반군들은 소매상이 분명이 스파이가 틀림없다고 믿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그에게 스파이 노릇을 하면 목을 내놓아야 한다고 단단히 경고했다.
기병대의 대위인 던우디는 마침내 배반자를 속출해내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이를 위해서 영국군 그리고 미국군 사이의 틈새 길 사이에 숨어 있다가, 소매상을 체포했던 것이다. 그의 호주머니에는 영국군이 발급해준 신분증이 발견되었다. 소매상인인 하비 버치는 바로 이러한 신분증으로써 대영 제국 군인들의 검문을 아무런 제재 없이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병대 대위는 소매상 버치를 그가 지니고 있었던 물품들과 함께 창고에 가두어놓고, 거기에 보초를 세워두었다. 스파이는 내일 아침 교수형에 처하기로 되어 있었다.
당시에 군사 지역에는 이리저리 헐떡거리면서 방랑하는 순례자가 있었다. 하비 비치는 군인들에게 한 가지를 간절하게 청했다. 그것은 순례자와 면담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순례자는 헛간에 갇혀 있던 절망적인 수인을 면담할 수 있었다. 그는 야밤에 헛간으로 찾아가서, 죄인에게 양심 고백을 요청했다. 뒤이어 시편의 멜로디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소매상은 밤새도록 고함을 지르면서 노래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의 노랫소리는 오래 지속되었는데, 새벽 무렵에야 주위는 비로소 조용해졌다.
동이 트기 전에 순례자는 문을 열면서 보초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선한 양반, 군대에 다음과 같은 책이 있나요? 「마지막 순간의 기독교의 범행 혹은 끔찍하게 목숨을 끊음으로써 가능한 만인의 위안」이라는 책 말이오.” 이때 보초는 웃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절레절레 돌렸다. “그런 책은 세상에 있을 리 만무하지요. 거 참 재미있는 책이겠구먼!” 이때 순례자는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이런 싸가지 없는 죄인이 있나. 네 놈은 정말로 신의 노여움을 모르겠는가? 어서 내 말 (馬)을 대령하게. 요크타운에 있는 나의 경건한 동료룰 찾아가서, 지침서를 구할 수 있는지 물어볼 참이네.” 바로 이때 두 사람은 헛간에서 비명을 지르는 죄인의 흐느낌을 들었다.
보초는 빗장을 열고, 순례자가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여명이 밝아오자, 군인들은 헛간에서 수인을 끌어내어, 처형대에 묶었다. 그러나 요크타운으로 떠난 순례자는 아직 그곳으로 당도하지 않았다. 신앙인이 없었으므로 대위가 직접 기도를 올려야 했다. 그렇지만 주위가 밝았을 때, 순례자는 처형의 시점에 정확하게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처형대에 올라간 사람은 소매상인이 아니라, 순례자였던 것이다. 사실인즉 어둠 속에서 소매상인, 하비 비치는 순례자로 가장하여, 어디론가 안전하게 피신했고, 대신에 순례자가 소매상인의 옷을 입고 재갈이 물린 채 교수대 위로 올라갔던 것이다.
상기한 사건이 발생한 지 수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에 북아메리카의 군대는 통합되었고, 요크타운의 클린턴 장군이 군대의 수장이 되었다. 그의 지도력은 누구와도 비할 바 없는 것이었다. 당시는 1781년 10월이었다. 사람들은 이때를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었고, 자유로운 미국은 몇 년 후에 가장 훌륭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기 때문이었다. 무관심한 사람들조차 이제 공화국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조차도 시민으로서의 명예를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예외가 있었다. 나라를 배반한 사람들은 시민으로서의 보편적 권리를 되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소매상인 버치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미국 북부지역과 서부 지역을 떠돌아다닌다는 소식을 간간이 접할 수 있었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 내전이 종식된 지 약 20년이 지났다. 이미 오래 전에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도 사망하여 묘지에 안장되었다. 어느 날 저녁 미국의 장군으로 승진한 던우디는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나이아가라 근처의 들판에서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그 지역에서는 캐나다 출신의 영국 출신의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여전히 작은 전투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평화의 시기인데도 인종간의 갈등은 여전히 전쟁으로 비화되었던 것이다.
던우디 장군은 말을 돌리려던 찰나에 들판에서 사살당한 민간인 한 명을 발견한다. 죽은 사람은 일견 프랑스 의용병 같기도 하고, 그게 아니라면 시신을 뒤져서 귀중품을 착복하는 도둑 같이 보였다. 장군은 말에서 내려 시신을 유심히 바라본다. 온몸에 피가 흐르고,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죽은 사람은 다름 아니라 오래 전에 자신이 대위로 근무하던 시절에 스파이 혐의로 인하여 헛간에 잡아두던 하비 비치인 것 같았다. 장군은 두 발로 시체에 묻어 있는 동물의 시신을 닦아내었다. 그러자 얼굴에 묻은 진창이 걷어지고 소매상의 얼굴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시신의 목에는 쇠줄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작은 깡통이 매달려 있었다. 부하들이 깡통을 열자, 거기에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던우디 장군이 신호하자, 부하들은 누렇게 변색된 종이쪽지를 가지고 왔다. 장군은 놀라운 표정을 지으면서 기이한 종이쪽지를 읽었다. 이때 장군의 입술은 창백하게 변한다. 거기에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직접 쓴 글발이 있었다. “이 땅의 명운이 참으로 위태로운 국면이었으므로, 비밀 하나를 감추고 살았는데, 이제 나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 하나를 솔직히 털어놓으려고 한다. 하비 비치는 지금까지 영국 군인들을 돕는 스파이로 간주되었다. 그는 적을 교란시키고 적의 계획에 관한 가장 중요한 정보를 찾아내어 나에게 전한 사람이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나는 이를 공개하여 한 사람을 복권시킬 수 없었다. 그는 모든 공로에 대한 보상을 거부하였다. 조국은 그에게 정말로 커다란 빚을 지었다. 자랑스럽게 말하건대 하비 비치는 나의 진정한 친구다. 후세 사람들은 일견 그가 행한 잘못 때문에 결코 그를 처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신께서 그의 공로를 찬양하실 게 분명하다. 조지 워싱턴.” 던우디 장군은 죽은 사람의 가슴에 자신의 장검을 놓았다. 스파이, 소매상인의 시신은 군영으로 이전되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한 인간은 수많은 군인들 앞에서 축포 받으며, 찬란한 인간으로 땅에 묻히게 된다.
'28 Bloch 흔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블로흐: 은폐된 위대한 인간성 (3) (0) | 2021.01.01 |
---|---|
블로흐: 은폐된 위대한 인간성 (2) (0) | 2020.12.29 |
블로흐: 종이쪽지의 비밀 (3) (0) | 2020.12.18 |
블로흐: 종이쪽지의 비밀 (2) (0) | 2020.12.18 |
블로흐: 종이쪽지의 비밀 (1) (0) | 2020.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