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평가 항목에서 수강생 가운데 한 사람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습니다. 나와 수강생 사이에 얼마나 커다란 오해가 자리하는지를 다시 한 번 절감했습니다. 내용을 공유하기 위해서 발췌해서 그 분의 글을 올리니, 읽고 숙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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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에 나는 누구로부터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 교수님께서 이 수업을 처음 시작하던 날, '그 눈은 어제 내렸던 눈이다'라는 뉘앙스의 문장을 독일어로 언급하시면서 '성폭행 또한 이미 과거의 한 사건일 뿐이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셨던 거 기억하시는지요.
친애하는 O, (누구인지 모르니, O라고 부르겠습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성폭행 또한 이미 과거의 한 사건일 뿐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수업시간에 나는 "한 인간의 자의에 의해 저지른 과거의 성적 실수"를 언급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다가 최근 교수님께서는 교수님의 다른 수업에서 어떤 학생이 교수님의 교재에 기재된 브레히트 시의 내용에 관해 항의를 했던 사건에 관해 저희에게 얘기하셨죠. '브레히트가 그렇게 말한 걸 교재에 기술했을 뿐인데 나보고 어쩌란 거냐'라고요. 교수님, 교수님께서 그 사건을 잊지 못해서 저희에게까지 목소리 높여가며 해당 학생을 비꼬듯이 털어놓으시는 것처럼 성폭행 당한 피해자들은 자신의 사고에 관한 기억을 거의 평생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죄송합니다. 오해로 인한 답답함에 대한 하나의 항변이라고나 할까요? 다른 강의, "인문학과 상상력"에서 약간의 언쟁이 발생했습니다. 그때 나는 몇몇 자구적 문장만으로 교수를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세우는 새내기들에게 실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폭력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사항은 아닙니다. 30년 동안 강의했지만, 이러한 일이 발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감히 남의 트라우마에 관해 '그런 건 이미 녹아버린 눈과 같은 것이다'라고 멋대로 정의하지 마세요. 진심으로 화가 나고 너무나 불쾌했지만, 또다시 다른 강의나 장소에서 그 학생처럼 이리저리 뒷담화 될 제 자신을 상상해보니 직접 손들어서 말하는 건 차마 못하겠더군요.
Schnee von gestern 을 설명하면서, 나는 과거의 잘못, 과거의 불행, 과거의 실수가 현재 살아가는 인간의 발목을 옥죄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자의에 의한 성적 실수는 성폭력과는 별개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과거에 내린 눈 Schnee von gestern" - 그것은 삶에 있어서의 어떤 갱생 (更生) 내지는 부활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양인의 심리 구조를 알려주는 속담입니다. 나는 그 외에도 수석 합격에 관해서 언급했는데 기억나시나요? 초등학교 1등한 게 현재 살아가는 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SKY대학교 출신이라고 자랑하는 어느 좀팽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현재의 능력이 중요하지, 과거의 능력은 현재 살아가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현재 바르게 살아가면 된다고 그들은 마음먹지요. 과거의 불행이 언제까지 곱씹어져야 하는가? 하고 서양인들은 자문합니다. 서양인들의 사고가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며, 과거의 불행을 외면하는 태도 역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과거에 얽매이는 것은 현재 삶에 악재로 작용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브레히트가 그렇게 말했든 말든, 그걸 교재에 기술하겠다고 '선택'한 사람은 교수님 본인 아닌가요. 적어도 그 선택에 대한 책임, 그리고 선택한 이유에 관해서는 그 학생과 충분한 대화를 하셨어야 '어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못한 점을 자랑스럽게 저희에게 늘어놓는 건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시와 시인에 관해서 나의 설명이 부족했음을 통감합니다. 한 가지 명제는 수많은 의향을 지니고 있지요. 대학에서는 의향과 견해가 언급되고, 그 타당성이 논의되어야 합니다. 다른 수업 시간에 나는 그 학생에게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자고 말했으나. 새내기 그 학생은 혼자 알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수업시간에 교실을 박차고 나가더군요. ㅠㅠ
20세가 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모든 반응의 책임을 학생들에게 전가하는 건, 교재를 기술하는 작가로서도 옳지 못한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교수님이 수업에서 말씀하셨죠. '어린 시절 선생님의 칭찬 한 마디에 들떴던 날을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요. 그 학생이나, 저나, 또한 너무나 큰 실망감에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이 시간을 지나갈 몇몇 학우들 또한 교수님의 언행을 똑바로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미투도, 그 뭣도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끔찍한 사항, 파렴치한 점, 내면을 갉아먹는 모든 고통에 관해 서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진리 추구의 방향이고 배움의 과정이라고 믿습니다. (O의 주장대로 20세가 넘었다는 게 모든 것을 합리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60이 넘어도 인간은 실수를 저지르고도 무언가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니까요. 이 점에 있어서 O의 말은 전적으로 타당합니다.)
(...) 두 번 다시는 타인 앞에서 '성폭행은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다.'라는 식의 발언은 제발 자제해주시길 바랍니다. 저 같은 피해자가 같은 강의실에 앉아 있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이것이 2차 가해라는 것을, 적어도 문학을 가르치신 교수님이시라면 아시겠지요.
지금까지 성폭력에 관해 한 번도 강의한 적 없었듯이 앞으로도 이에 관해서 강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화간에 관해서는 지속적으로 언급할 예정입니다. 독일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인과 유럽인 사이에 도사린 사랑과 성에 대한 관점의 차이이니까요. "인간은 동물과 달라서 한 번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그렇지만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자신의 어떤 행동을 하나의 실수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한에서 말이다." 여기서 지칭하는 실수란 반드시 성적 실수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부디 O의 아픔이 언젠가는 치유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부디 가해자를 찾아서 O의 피해를 물질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보상받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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