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J, 계층적으로 분할된 신분 사회에서는 정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법적인 투쟁을 할 때 승소하는 자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계층적으로 분할되어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 그리고 로마는 자유로운 시민들의 찬란한 영광을 자랑하지만, 고대 사회를 지탱해주는 토대는 노예 경제 체제였습니다. 중세에 그리스도 교부들은 찬란한 평등사회를 저세상으로 유보시킴으로써, 당시의 계층적으로 분화되어 있는 사회 구조의 틀을 신학적으로 정당화시켰습니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폭군의 횡포를 접할 때 끊임없이 자연법을 떠올리고 정의로운 법체계와 평등한 사회를 떠올렸지만, 이는 정치사상과 학문 그리고 이를 문학적으로 반영한 작품을 통해서 그저 문헌으로만 표현되었을 뿐입니다.
절대주의 시대에는 왕의 한 마디가 법이었고, 법이 바로 왕명이었습니다. 근대 이래로 자본주의가 활성화됨에 따라 시토이앙 세력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권력과 함께 이권을 누리던 사제와 귀족의 세력을 대신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이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성공을 거두고 소련 사회주의가 세계의 일부를 장악하게 되었을 때에도 만인의 평등은 요원한 미래처럼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당 관료들이 “현실 사회주의”를 부르짖으면서,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먼 미래로 연기시켜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권능을 자랑하던 신의 권능은 글로벌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자본의 권능으로 대치되고 말았습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계층과 신분 차이는 오늘날에 이르러 재산과 돈으로 계층화되어 있습니다.
법이 있는 곳에는 항상 돈이 있다. Ubi ius, ibi pecunia.
물론 정의로움을 관철시키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모든 희망을 저버리자."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 확실한 것은 자연법이 지금까지 언제나 인간의 갈망의 영역에 머물렀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실정법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계층 사회와 신분 사회를 전제로 하여 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퀴나스의 주장과는 달리 정의가 아직 제반 국가의 토대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의로움은 동등한 계층의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법적 규정이지만, 계층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분명히 규정지을 수 있는 원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만인에게 자신의 것을 행하게 하라 suum cuique tribuere”는 플라톤의 발언은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얼마든지 마키아벨리 방식의 통치 수단으로써 악용될 수 있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각자가 자신의 일을 수행하고 있는 동안 권력자는 교활한 방법으로 만인의 권력을 빼앗아서 얼마든지 남용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만인에게 자신의 것을”이라는 전언은 놀랍게도 독일 파시스트들에 의해서 교묘하게 이용당했습니다. 그것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유대인 강제수용소, 부헨발트에서 하나의 슬로건으로 사용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이클 샌델처럼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추상적인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모든 나라에서 통용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해낼 게 아니라, “과연 이 땅에 정의가 존재하는가?”하고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판명될 경우, 우리는 정의로움의 구현을 위해서 무엇을 행해야 할 것인가? 하고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2 나의 잡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극기 부대와 아무개 목사 (0) | 2020.08.22 |
---|---|
간접 체벌과 붕어빵 교육 (0) | 2020.07.23 |
"어제의 눈 Schnee von gestern" (0) | 2019.07.28 |
미국의 칼렉시트 가능한가? (0) | 2019.06.24 |
노벨 문학상, 혹은 요구르트 Alles Mueller oder was? (0) | 2019.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