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잡글

노벨 문학상, 혹은 요구르트 Alles Mueller oder was?

필자 (匹子) 2019. 3. 31. 14:13

 

친애하는 J, 200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서 루마니아 출신의 소설가 헤르타 뮐러가 선정되었습니다. 뮐러는 흔한 이름입니다. 나는 뮐러라는 이름을 들으면, 독일에서 즐겨 먹던 요구르트가 생각납니다. 노밸상의 수상작은 "Atemschaukel" 이라고 합니다. 이는 직역하자면 "호흡 그네", "(그네처럼) 흔들리는 호흡"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소련 강제 수용소에서의 각박한 삶의 체험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수많은 루마니아 독일인들이 소련으로 끌려가서 고초를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루마니아에는 그곳 출신의 독일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소련 군인들은 그곳의 독일인들이 과거에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모조리 잡아다가 감옥으로 보내곤 하였습니다. 50년대 초반에는 수많은 루마니아 출신의 독일인들이 소련의 형무소로 끌려갔습니다. 그들 가운데 우리는 모제스 로젠크란츠 Moses Rosenkranz를 언급할 수 있지요.

 

재미있는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헤르타 뮐러는 동향의 시인 오스카르 파스티오르 Oskar Pastior와 함께 소설을 구상했는데, 파스티오르가 죽은 뒤에 그미가 작품을 완성했다는 사실입니다. 재주는 곰이 하고 돈은 사람이 거둔다고, 일은 같이 했지만, 공과를 차지한 사람은 헤르타 뮐러입니다. 오스카르 파스티오르는 참으로 훌륭한 시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2006년 파스티오르가 사망했을 때 독일 평론가들은 그에게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여하였습니다. 죽은 작가에게 뷔히너 상을 수상하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나는 파스티오르의 시가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추측이기는 하지만 스웨덴의 한림원은 통일된 독일의 단일 문화에 대해 우려를 표현하기 위해서 소수민족 출신의 독일 작가를 선택했는지 모릅니다.

 

 

 

 

 

오스카르 파스티오르 (1927 - 2006)

 

친애하는 J, 사실 헤르타 뮐러는 독일의 수준 높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에 속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전설적인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Reich-Ranicki는 미국 작가 필립 로스 Phillip Roth가 올해에도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했다고 통탄한 바 있습니다. 과연 그가 김지하, 고은 그리고 황석영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원일, 돌아가신 홍성원 그리고 이청준 등의 작가들은 참으로 훌륭한 명작들을 탄생시켰습니다. 우리 나라 작가 가운데에서도 헤르타 뮐러 정도의 작품을 완성한 작가는 참으로 많습니다. 한국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까닭은 아마도 언어의 장벽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고 해서 모조리 훌륭한 작품을 문학사에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가령 톨스토이가 상을 타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말하는 톨스토이는 알렉세이 콘스탄티노비치 톨스토이 (1817 - 1875)도 아니고, 알렉세이 니콜라비치 톨스토이 (1883 - 1945)도 아닙니다. 내가 거론하는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문호 레오 톨스토이 (1828 - 1910)입니다. 말년에 파시즘 혐의를 얻은 바 있는 미국시인 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역시도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독일 작가이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파울 하이제 Paul Heyse의 작품은 오늘날 문학사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자고로 (문학) 상이란 청마 유치환 선생의 말대로 (죄송한 표현입니다만) 상 주는 놈 (혹은 년?^^)을 위한 이지, 상 받는 작가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장 폴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가 노벨 문학상을 처음에 거부하는 제스처를 취한 것도 그 때문인지 모릅니다.

 

 

 

 

 

카메라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짓는 헤르타 뮐러.

 

  

친애하는 J, 헤르타 뮐러는 한국에서 거의 소개되지 않았으며, 소개할만한 수준 높은 작가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이너 뮐러, 아니 카챠 랑게 뮐러에 비하면 헤르타 뮐러는 약간 바닥이지요. 한국의 출판계는 한국문학을 선호하고, 외국문학을 들러리 취급하곤 합니다. 외국문학자들은 번역 원고를 들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지만, 한국의 출판사는 번역 원고들을 성큼 받아들어 출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누군가 노벨상을 타게되면 그제야 부랴부랴 책을 간행하곤 합니다. 우리는 한림원의 유럽 중심주의를 비판하기 이전에 한반도, 다시 말해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진 천박한 문화 풍토를 스스로 비판해야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J, 사람들은 고은 시인이 노벨 문학상을 타지 못해서 안타깝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고은의 시집 만인보를, 최근에 간행된 개념의 숲 을 읽고, 그 내용을 접하며, 시인의 내적 위대성을 발견하는 게 절실할 것입니다. 과연 고은 시인의 시집이 한국에서 몇 권 팔렸습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싸구려 베스트셀러에 혈안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수동적 자세로 마치 감 떨어지듯이 노벨 문학상을 바랄 게 아니라, 두 가지 사항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는 가령 우리가 (고은 시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름 없는,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한 예술가애호하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왜 남한에는 메디치와 같은 문화의 조력자들이 없습니까? 우리의 주위에는 가난하지만 처절한 각오로 명작을 남기려는 숨은 장인 匠人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애호하며 심리적으로 물질적으로 후원해야 합니다. 이름없는 작가들이 마음대로 작품집을 간행할 수 있도록 작가들을 도와야 합니다. 훌륭한 작품을 간행하는 출판사를 무조건 도와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실력있는 번역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번역자란 한국인 외국문학자 뿐 아니라, 해외에서 거주하는 한국문학자 또한 포함됩니다. 해외의 도서관 극동 코너에 가보세요. 거기에는 남한에서 간행되는 수많은 잡지들은 한 권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김일성과 관련되는 홍보용 북한 책들밖에 없습니다. 남한은 해외 홍보에 전혀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유럽 대학의 대부분의 한국어 한국문학과는 폐쇄 위기에 처해 있고, 한국문학자들은 한국문학의 번역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실정이지요.

 

참고로 상명대학교 박정희 교수님이 헤르타 뮐러에 관한 논문을 집필 발표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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