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현대영문헌

서로박: 어슐러 르귄의 "어둠의 왼손" (1)

필자 (匹子) 2021. 7. 5. 10:29

1. 인간의 어깨에는 상상의 날개가 달려 있다. 날개는 보이지 않지만, 갈망하는 자로 하여금 무한한 공간 그리고 무한의 시간 저편으로 떠나게 합니다. “우리에게 꿈이 없다면, 세상은, 과거와 미래는 얼마나 황량하겠는가? 꿈을 상실하느니 나는 차라리 고통과 불행, 피눈물의 삶을 송두리 채 저버릴 것이다.” (어슐러 르 귄) 대부분 사람들은 지금 여기의 현실만을 중시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허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체로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자들이 그렇게 판단하지요. 이들은 가령 형이상학을 무가치한 학문으로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해서는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요. 실용주의자 가운데에는 회의주의자들이 참 많습니다. 가령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인간은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일갈하면서, 마치 디오게네스가 통속에 살았듯이, 책을 멀리 하면서, 초등학교 교사로 평생을 살다가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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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학문적 폐쇄주의 비판: 한국은 36년이라는 일제 강점기를 거쳤습니다. 이로 인한 정신사의 측면의 폐해 가운데 하나는 문화적 폐쇄주의입니다. “시인은 오르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르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르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김광규: 생각과 사이) 

 

모든 식민지인들은 송충이 솔잎만을 먹고 살고, 자신의 본분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강령이었습니다. 이러한 강령 속에는 지배자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게 하는 속셈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3. 폐쇄의 한계를 넘어서자. 이는 나아가 학문의 영역에서 문학의 영역에서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국문학자는 국문학만, 영문학자는 영문학만, 에스파냐문학자는 에스파냐 문학만 다루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시만 쓰고, 소설가는 소설만 쓰고, 수필가는 수필만 집필하는 형국이 대두되었습니다. 모든 게 폐쇄적이 되었습니다.모두에게 자신의 것을 suum cuique이라는 플라톤Platon의 슬로건은 정치가의 지배 논리로 고착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학은 본질적으로 생각의 사이를 유추하게 해주는 영역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이웃들은 야밤에 도둑이야하는 소리를 들으면, 모른 체하고 그냥 잔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 불이야!” 하고 외치면, 사람들은 모두 잠자리를 박차고 집 밖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만약 문학 작품이 하나의 화재와 같은, 삶과 직결되는 우리의 이야기를 서술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은 너에 관한 이야기다. De te fabular.”고 생각하면서 정신을 번쩍 차릴지 모릅니다.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문학 작품 - 이것이야 말로 자극의 문학, 경종의 문학일 것입니다.

 

 

4. 사이언스 픽션, 끝나지 않은 가능성: 남한은 특히 폐쇄적인 사회에 속합니다. 이러한 풍토에서 특히 어슐러 르귄의 사이언스 픽션 문학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 연구자들은 그미의 문학을 얼토당토 없는 공상의 이야기라고 치부할지 모릅니다. 남성 작가들은 여자가 무슨 사이언스 픽션 문학을 추구한다고 하니, 말도 안 된다.”고 콧방귀 뀔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주로 연애 소설을 필한 자들은 여성들이었고, SF 소설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문학평론가, 복도훈은 SF는 공상하지 않는다는 책에서 SF의 장르가 얼마나 전통 문학의 확장에 기여할 수 있는가를 예리하게 지적한 바 있습니다. 세밀히 고찰하면 어슐러 르 귄 (Ursula Le Guin, 1929 - 2018)의 사이언스 픽션의 소설의 주제는 사이언스 픽션의 특징에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그미의 문학은 여성 운동 그리고 평화 운동에 자극을 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미의 문학적 주제는 다만 SF로 포장되어 있을 뿐입니다. SF의 가면을 벗기면, 르귄의 문학은 우리에게 성 평등 그리고 평화 운동의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4. “왕이 임신했다.”: 이 말은 어슐러 르 귄의 소설 "어둠의 왼손The Left Hand of Darkness" (1969)에 기술되어 있는 문장입니다. 문학 평론가 D. R. 화이트White는 이것을 20세기 영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문장이라고 말했습니다. 남자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일반 사람들의 통념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앞으로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유전자 개체 복제의 기술을 통해서 남성이 아이를 낳는 그러한 시대가 분명히 출현하게 될 것입니다.

 

동성연애가 일상화되고, 드래그 킹 그리고 드래그 퀸이 활보하는 시대에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라는 특징은 진부하고 시대착오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슐러 르 귄의 소설에 묘사되는 에스트라벤이라는 우주인은 지구인과 무척 흡사하게 생겼는데, 남성이자, 동시에 여성으로 살아갑니다. ()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몸속에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이로써 작가 르 귄은 1960년대말에 성 혁명과 페미니즘에 급진적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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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성욕은 양날의 칼이다.: 우리는 살면서 사랑과 성의 기능 그리고 그 모순성을 직시하곤 합니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 내지 성욕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불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욕구가 충족됨으로써 행복감을 만끽하곤 합니다. 그런데 사랑과 성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인간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공격 성향을 드러냅니다. 성욕은 때로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이며,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맹목적입니다. 성은 그 자체 아름다운 무엇입니다.

 

그러나 성에 강요와 폭력이 추가되면, 끔찍한 폭력을 낳게 되고, 이는 나중에 얼마든지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습니다. 르 귄에 의하면 성적 욕구 불만을 품는 사람이 표출하는 게 폭력이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히틀러는 아버지에게 맞고 자랐습니다. 폭력은 다시 성폭력을 잉태합니다. 그렇기에 폭력과 성폭력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르 귄은 깊이 숙고합니다. 전쟁 없는 사회는 어떻게 창조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성욕을 어느 정도 약화시키면, 평화의 토대는 어느 정도 다져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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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성욕과 공격성향: 성욕이 차단될 수 없는 무엇이라면, 그것은 어떠한 방식으로 어느 정도 약화될 수 있을까? 르 귄은 이렇게 숙고해나갑니다. 주지하다시피 동물들에게는 짝짓기의 시기, 발정기가 있습니다. 발정기는 독일어로 die Brunstzeit, 혹은 die Paarungszeit라고 하지요. 식물들에게는 꽃이 만발하면 암수가 맺어지는 만개의 시기가 있습니다. 특히 동물은 발정기 외에는 성적 욕망을 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발정기가 없습니다. 인간은 수시로 성적 욕망을 느낍니다.

 

르귄의 표현을 직접 인용하건대 사시사철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리는 생식기, 이것이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그려준 인간의 초상입니. 여기에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없으며, 사람마다 약간의 정도의 차이가 주어져 있을 뿐입니다. 르 귄은 계속 추론해나갑니다. 만약 인간 역시 일정 기간 동안 성욕이 없다면, 어떨까? 인간에게도 발정의 시기가 있다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인간의 공격 성향이 줄어들 것이고, 전쟁 또한 수그러들지 않을까? 하고 르 귄은 숙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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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SF는 새로운 은유이다.: 사실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 형용 모순 Oxymoron입니다. “과학이 어찌 픽션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슐러 르귄은 문학의 장르 기운데 SF를 선택하여, 여기서 어떤 새로운 소설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종래의 소설 양식은 언제나 주어진 현실, 다시 말해서 리얼리티를 요구합니다. 리얼리티에 의존하면, 언제나 주어진 사회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이는 작가의 상상력을 처음부터 차단시키는 악재로 작용합니다. 게다가 소설 속의 이야기는 주어진 사회의 관습과 도덕 그리고 법이라는 제약을 받게 되고, 판에 박힌 갈등을 부각시키게 합니다.

 

이에 반해 SF는 어떤 새로운 실험적 조건을 제시합니다. 게다가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닙니다. 또한 주어진 관습 도덕 그리고 법의 한계를 뛰어 넘어설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르 귄은 SF를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SF는 하나의 메타포, 다시 말해서 은유다.” 현대 소설은 SF를 통해서 하나의 새로운 은유를 서술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SF사고의 실험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